나는 기차를 타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어릴 때부터 기차를 매우 좋아해서 기차 장난감을 모으는 꼬마였다 거나 기차 자체에 엄청난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니다. 그냥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이 좋고, 그곳으로 가는 길이 좋다. 이동하는 과정을 포함한 여행의 모든 순간순간이 좋다.
버스를 타면 창밖으로 볼 수 있는 풍경이라곤 고속도로와 다른 차들 뿐이고 멀리 봐야 그나마 산이나 들이 보인다. 한국 버스엔 화장실도 없고, 다른 나라 버스엔 화장실이 있어도 매우 좁고, 청결도가 떨어진다.
비행기는 대부분의 경우 외진 곳에 위치한 공항으로 들어가고 나오는 길이 오래 걸리고, 짐을 맡기고, 찾고, 출입국 수속을 해야 하며, 보통 몇 시간씩 일찍 가서 기다려야 하고, 너무 좁은 한 좌석에 몇 시간을 계속 앉아있어야 하며, 창밖 풍경이라곤 잠깐의 이착륙을 제외하고는 구름 위를 보는 것뿐이다.
기차역은 대부분 도시의 중심부에 있어 비행기보다 출발지에서 도착지까지 걸리는 시간은 길지만 공항과 도시 간의 이동시간과 기다리는 시간을 따져보면 적게 걸리는 경우도 많이 있으며, 자동차처럼 교통체증이 있지도 않으며, 화장실과 식당칸이 있고, 창밖의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기차는 버스보다 빠르고 비행기보다 오래 걸린다.
한국에 있을 때 국내에서는 보통 기차를 많이 이용하지만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가는 경우엔 어쩔 수 없이 배나 비행기를 타야 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다른 나라, 혹은 엄청나게 큰 나라에서의 도시에서 도시로의 이동시엔 육로 이동 편이 있다면 비행기 대신 기차나 버스를 탄다.
캐나다에 있을 때, 약 5일이 걸려 밴쿠버에서 토론토로 가는 기차(Via Rail)를 탄 적이 있다. 그때, 내 주변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면 돈도 시간도 적게 드는데 굳이 왜 기차 안에서 5일이나 사서 고생을 하냐고 했다. 나는 아니 이 넓디넓은 캐나다에 와서 겨우 몇몇 도시밖에 돌아볼 수 없는 것도 안타까운데 기차라도 타서 5일이라는 시간 동안 창밖으로 캐나다 구경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기차로 아무리 달려도 몇 시간이면 끝나는 작은 나라 한국에서는 이런 경험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데 5일이나 기차에서 안 내리고 있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이런 경험을 또 언제 어디서 해볼까.
그리고 토론토에서 몬트리올(약 8시간), 몬트리올에서 뉴욕(약 10시간)까지도 기차로 이동했다.
몇 년이 지나고, 영국에서 살면서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어디를 여행할까 지도를 살펴보다가 한국까지 여러 나라들로 이어져 있는 걸 봤다. 이번 여행에 모든 나라를 다 들리며 돌아가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육로로 최대한 이동하고 싶었다. 그리고 러시아에는 지구 둘레의 1/4을 달리는 세상에서 가장 길다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있으니 그걸 타고 종점까지 가면 러시아의 동쪽 끝에서 비행기를 타면 되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것은 내 어릴 적부터의 소망도 아니었고, 죽기 전에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목표도 아니었다. 그냥 기차에 앉아 창밖을 보는 것을 좋아하고, 그게 길어도 별 상관이 없으며, 그냥 가는 길에 있길래 겸사겸사 그렇게 되었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열차는 한밤중에 출발했다. 미리 사두었던 식량을 바리바리 싸들고 커다란 트렁크를 질질 끌고 모스크바의 역으로 갔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사람들이 졸린 눈으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이 되어 열차로 향했다. 엄청나게 긴 열차에서 내가 예약한 자리로 걸어갔다. 기차역에서 표로 바꾸지 않아도 되는 프린트 해온 종이를 내밀고 여권을 보여줬다. 승무원은 영어를 아예 못했고 나는 러시아어를 못했다. 그래도 숫자를 보고 옆에 사람들한테 물어서 자리로 왔다. 7일 동안 열차 생활을 하기에 3등 칸은 너무 많은 사람들과 함께 열려있는 커다란 한 칸에서 지내야 하는 게 불편할 것 같아서 같은 성별끼리 만 사용하는 4인실인 2등 칸으로 선택했다. 우리 방에는 러시아인 엄마와 두 딸이 나랑 같이 탔다. 오래되었지만 튼튼해 보이는 기차 안은 생각보다 아늑하고 편안했다.
시트, 베개, 이불, 수건, 칫솔, 일회용 슬리퍼를 준다. 승무원에게 부탁하면 컵도 빌릴 수 있다.
열차칸의 양 끝에 화장실이 있고 승무원 방 앞에 24시간 마실 수 있는 뜨거운 물이 나오는 물탱크가 있다.
방안에는 콘센트가 없고 칸 통로에 콘센트가 몇 개 있다. 연장용 멀티탭이 있으면 방안에서도 사용 가능.
와이파이는 당연히 없고 역에 서면 LTE가 터지는데 열차가 달릴 땐 인터넷이 아예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열차가 출발하고 얼마 후에 승무원이 와서 식사가 제공되니 메뉴나 언제 먹을 것인지를 고르라고 했다. 나는 일부러 식사가 포함되지 않은 표를 찾아서 예매했는데 한 끼는 그냥 주는 거라고 했다. 나는 동물성을 안 먹는다고 했고, 승무원은 베지테리언 메뉴가 있다고 했다. 나는 소젖이나 닭알도 안 먹는다고 했다. 그냥 쌀밥이 나오는 날이 있으면 다른 건 다 주지 말고 쌀밥만 달라고 했다. 룸메이트들은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외계인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승무원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이 대화는 구글 번역기를 사용하다가 열차가 달리는 중이라 잘 작동하지 않아 같은 방의 러시아인 큰 딸이 단어를 검색하며 통역을 도와주어서 이루어졌다.
이 열차엔 러시아 사람들만 타는 것 같았다. 듣기로는 여름에는 여행객들도 많이 탄다고 했는데 그건 3등 칸인가 보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다가 영어를 하는 사람을 만났다. 라트비아에서 온 바이바. 영국에 살고 있고 몇 년 전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적이 있고, 친구랑 바이칼 호수에 간다고 했다. 라트비아에서 어릴 때 러시아어를 배웠다고 한다. 러시아어라고는 네, 아니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밖에 모르는 내가 7일 동안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횡단하는 게 신기하고 용감하다고 했다.
쌀밥은 바로 다음날 저녁에 예정보다 한 시간 일찍 나왔다. 러시아 엄마는 자기 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으라며 자리를 내어주셨고 옆에서 러시아어로 말을 하셨는데 딸이 수줍게 통역을 해줬다. 분명 다른 건 다 빼고 밥만 달라고 했는데도 엄청 작은 물, 작고 딱딱한 빵, 진공 포장된 작은 소시지 몇 조각, 초코과자도 줬다. 밥이랑 가져온 김이랑 같이 먹었다. 밥은 너무 짜고, 쌀 속은 안 익었으며 밖에는 불어 터져 있었다. 이 사람들.. 쌀에다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열차를 타기 전, 미리 알아보던 중 열차 안에 식당칸이 있고 쌀밥과 함께 나오는 메뉴도 있다고 했기 때문에 혹시 밥이 너무 먹고 싶으면 식당칸에 가서 쌀밥만 달라고 부탁한 다음 김에 싸 먹어야지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밥을 먹은 뒤로 그 생각이 싹 달아났다.
밤에 자다가 강아지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아침에 화장실로 가는데 동그랗게 생긴 러시아인 아빠가 동그랗게 생긴 아기를 들어 창밖을 보여주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서 기다리는데 갑자기 어떤 방에서 작고 뽀송뽀송한 강아지가 쫄쫄 걸어 나오더니 옆방으로 쏙 들어갔다. 동그란 아빠는 급하게 뭐라고 강아지를 부르더니 동그란 아기를 방안에 누군가에게 건네주고 그 방으로 들어가 강아지를 데리고 강아지가 처음에 나왔던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기차 안에서 한 일
창밖 구경하기, 사람들 구경하기
차 마시기, 과일이나 음식 먹기
공책에 글쓰기
누워있기, 낮잠 자기, 졸리면 자기
영어 할 수 있는 사람 만나면 이야기하기
스트레칭하기
매일 정말 먹고 자고 쉬고 창밖을 구경했다. 한 번은 바이바랑 얘기하다가 바이바 친구가 다른 칸들 구경하고 왔다고 하길래 나도 몇 칸을 가는데 칸마다 문이 있고 다른 칸으로 가려면 문을 열고 덜컹거리는 곳을 지나 다시 문을 열고 가는데 뭔가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간 것 같고, 아무도 없으면 몰래 들어간 것 같고 기차가 너무 흔들려서 한 세 칸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마침 내가 돌아보던 날 기차가 특히 더 많이 흔들렸다. 근데 뭐 딱히 볼만한 것도 없었다. 창밖 구경이 제일 재밌다.
첫날밤에 열차에 타서 매일 시간이 한 시간씩 늘어났다. 한 번은 자꾸 변하는 시간 때문에 시차 적응을 못하고 밤에 잠이 안 와서 통로로 나와서 러시아 미니 베이글 모양의 딱딱하고 짭짤한 과자를 먹으며 휴대폰을 충전하면서 사진을 정리한 적이 있었는데 창밖은 어둡고, 통로는 노란 등만 켜져 있고, 다들 자느라 조용하고 기차가 달리는 소리만 들렸다. 편안하고 아늑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기차에 가지고 탄 것
캐리어; 영국에서 살던 짐 보내고 남은 거 다 싸들고 여행하면서 가져간 짐
식량; 물 2L, 차이 티 1 상자, 모히토 티 1 상자, 복숭아, 사과, 배, 오렌지, 당근, 쿠스쿠스, 김, 아몬드, 다크 초콜릿, 빵, 과자. 중간에 약간 길게 멈출 때 나가서 과일, 물, 과자, 견과류 더 삼
안대; 밤에 역에서 멈춰서 사람들 타고 내리는 경우도 있고, 밤에 어두운데 전등이 밝은 곳을 지나갈 때도 있고, 낮잠 잘 때 너무 밝을 때도 있고, 난 피곤한데 사람들이 방에 불을 켜는 경우도 있다. 아주 유용했음
귀마개; 나는 여자들만 있는 방이라 하루 이틀만 같이 지냈던 코 고는 사람 한 명을 빼고는 조용하게 잘 왔는데 밤에 사람들 왔다 갔다 할 때나 밤에 시끄러운 룸메를 만날 경우 유용
종이와 펜; 인터넷도 없고, 충전도 편하게 못하니 심심할 때나 기록하고 싶을 때 좋음
같이 지낸 지 며칠 후에 룸메 모녀에 대해서 조금 알게 되었다. 가족끼리 터키로 여행을 다녀왔고, 큰딸은 중간에 먼저 대학교가 있는 곳에서 내리고 엄마랑 작은딸은 바이칼 호수 근처의 집에 간다고 했다. 그들은 심심하면 챙겨 온 카드게임을 했고 사이가 좋은 사랑스러운 가족이었다.
러시아말을 모르니 기차 안에 안 그래도 나 혼자 있는데 더더욱 고립된 느낌이었다. 방안의 딸들은 영어를 하긴 하는데 수줍음이 많았고 엄마가 러시아어로 말할 때나 내가 영어로 말할 때 해석을 잘 안 해줬다. 통로에서 바이바랑 만날 때마다 바이바가 이런저런 얘기를 해줬다.
기차에 경찰들이 타고 순찰을 하러 다닌다. 나는 기차 안에 다 같이 갇혀있어서 사람들이 서로 배려하고 잘 지낸다고 느꼈는데 술을 먹고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고.
식당칸에 커피가 동이 났다고 해서 무슨 식당칸에 커피가 없으면 도대체 뭐가 있냐 하니 말이 식당칸이지 러시아인들에게 식당칸은 술 먹는 칸이라고.
바이바의 룸메가 메뉴에 있는 음식을 시켰는데 안된다고 했다. 그럼 애초에 메뉴를 보여줄 때 말을 해야지 이게 무슨 경우냐며 매니저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잠시 후 처음에 시킨 음식이 바로 나왔다.
식당칸의 요리사에게 팁을 남기면 기분 나빠한다.
우리가 탄 열차칸이 오래되었고 3등 칸은 더 신식이라 3등 칸에는 자리마다 개인용 콘센트가 다 있다.
여태까지는 열차의 출입구 바로 앞이나 열차가 보이는 곳에서만 빨리 먹을걸 사서 다시 기차로 돌아왔는데 내 룸메 모녀와 바이바와 친구가 내리는 바이칼 호수 옆 역에서 바이바가 성분 확인을 도와준다고 해서 같이 내렸다. 근데 매점은 열차에서 보이지 않는 역 안에 있었다. 나는 갑자기 무서워졌다. 제시간에 못 돌아와서 열차가 나를 놓고 떠나면 어쩌나, 길을 잃어버리면 어쩌나, 바이바는 걱정할 거 하나도 없다고 타는 곳을 기억하고 가는 길을 기억하고 돌아가면 된다고 했다. 그래도 음식을 사서 다시 열차로 돌아오기 전까지 나는 무서웠다. 최대한 빨리 성분을 확인한 과자랑 땅콩이랑 계산하고 바이바와 친구에게 인사를 하고 열차로 돌아왔다. 열차의 내 자리로 돌아오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내가 7일 연속으로 가는 표를 샀던 건 사실 겁도 났고, 귀찮기도 했기 때문이다. 열차 예매를 할 때, 열차시간이 다 모스크바 시간을 기준으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도시 시간에 맞춰서 내가 계산을 해서 나눠서 예매를 해야 하는 것, 나는 러시아말도 못하는데 내리는 곳을 놓치면 어떡하지, 혼자 러시아에서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기차역이랑 구경할 곳이랑 멀면 어떡하지, 그리고 내 큰 캐리어를 가지고 돌아다니는 것도 다 너무 귀찮게 느껴졌다. 그리고 캐나다에서도 5일 동안 기차에 있어봤으니까 7일도 뭐 괜찮을 것 같았다.
인터넷이 없는 달리는 열차 안에서 창밖을 하염없이 구경하는 것도, 매 끼니마다 밥을 챙겨 먹지 않는 것도, 말이 통하지 않아 혼자만의 고립감을 즐기는 것도, 따뜻한 차를 마시며 공책에 연필로 생각과 경험들을 적어나가고, 졸리면 자고 배고프면 먹는 생활을 하는 것도 다 괜찮았다. 나쁘지 않았다. 약 5일째가 지나갈 때쯤 점점 샤워를 할 수 없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양치와 간단하게 씻는 건 화장실에서 할 수 있었지만 머리카락을 감고 목욕을 하고 싶었다. 따뜻한 물에 들어가고 싶었다. 7일은 생각보다 길었다.
러시아의 어떤 열차에는 돈을 내면 샤워를 할 수 있는 곳도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아니었나 보다. 타기 전에만 해도 내가 한여름에 타는 것도 아니고 샤워 안 하고 머리를 감지 않아도 괜찮겠지, 열차 안에서 깨끗하고 따뜻한 물도 잘 나오지도 않을 텐데 차라리 그냥 안 하는 게 낫겠다 라고 생각했고, 에어컨이 너무 빵빵해서 추울 때도 많았고 대부분 쾌적해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약 5일 이후부터는 머릿속에서 도저히 '아, 머리 감고 싶다, 목욕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러시아 열차에 대해 보고 느낀 것
내가 7일, 즉 출발지부터 종착지까지 열차에 있었는데 승무원이 2교대로 7일 연속으로 일했다. 다행히 승무원은 샤워를 할 수 있다.
약 이틀에 한 번씩 승무원이 방바닥과 통로바닥을 청소기로 청소한다.
열차 실내는 22-24도를 유지하며 천장에서 에어컨이 나와서 위층 침대는 추울 때도 있다.
매니저가 방을 돌아다니며 불편하거나 필요한 건 없는지 승객들한테 물어본다.
열차는 러시아 사람들의 지역 이동수단이다. 집에서 학교를 가거나, 여행 갔다가 집으로 가거나. 비행기를 타는 것보다 기차가 저렴하다.
통로에 시간표가 붙어있는데 7일 동안 어디 역에서 몇 분 동안 멈추는 게 쓰여있는데 시간이 꽤 정확하다.
내릴 때가 되면 몇 시간 전에 승무원이 찾아와 어떤 표 같은 걸 주며 알려준다. 근데 나는 그런 거 안 주고 깨워 이불 시트랑 컵을 당장 내놓으라고 독촉했다.
문 쪽에 앉아서 창가를 오래 보고 있는데 경찰들, 기차 관계자들이 계속해서 문을 열고 기차를 돌아다닌다.
식사 미포함 표를 사도 한 끼는 제공이 되는데 직원이 방으로 식사를 가져다준다.
어린이는 엄마랑 같은 침대를 쓴다. 강아지도 같이 열차 타고 이동한다.
달릴 때는 인터넷이 안되지만 역에 멈추면 LTE가 아주 잘 터진다.
아래층 침대 하나가 몇 시간 동안 비어있던 때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창밖으로 해가 지는 걸 보고 있었는데 옆에 앉아있던 러시아 친구가 영어를 연습해도 되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의 이름은 다리아이고 집에서 대학교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다리아는 아버지의 영어를 쓰는 친구들이 집에 놀러 온 적이 많아 영어를 배우고 말했고, 남한과 북한에서 온 한국인 친구들과 함께 공부한 적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 사람들은 재밌다.
러시아 밖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내가 러시아에 간다고 하면 거기를 도대체 왜 가냐고 이상해했다. 그러더니 그래도 재밌을 거라며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내가 러시아말을 모른다니까 그게 더 낫다고 했다.
바르샤바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은 러시아를 왜 가냐,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 못하니까 물어볼 것이 있으면 근처에 호텔에 들어가서 물어봐라, 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에 오는 관광객들이 미쳤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사람들은 외국인들한테 관심이 많고 도와주려고 할 것이다.라고 했다.
러시아에 가기 전에 검색하다가 러시아의 길거리에서 웃는 사람들은 관광객들 뿐이다.라는 말을 봤는데 정말 길에서 웃는 사람들은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안 한다. 그들은 구글 번역기 앱을 사용한다. 친절하고 잘 도와준다.
슬로바키아 여행 중 호스텔에서 만난 러시아 친구를 상테부르크에서 만났는데 상테부르크는 가난하지만 아름답고 모스크바는 돈 많은 망할 놈들이라고 했다.
기차 안에서 만난 러시아 사람들은 러시아말이라고는 다(네), 니옛(아니오), 프리비옛(안녕하세요), 스파씨바(고맙습니다), 야이즈커레이(저는 한국에서 왔습니다) 밖에 모르는 나한테 어디서 내리니? 거기가 집이니? 거기가 학교니? 러시아에서 공부하니?라고 물어봤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다리아랑 내 옆 침대에 있는 중년 여성분이 아래층에 앉아서 나한테 같이 밥을 먹자고 여기 앉으라고 하시더니 이것저것 막 챙겨주시면서 먹으라고 했다. 이 아주머니는 가방 하나에 각종 컵라면, 인스턴트 으깬 감자, 과자 등을 챙겨 오셔서는 닥치는 대로 꺼내서 나한테 주려고 했다. 나는 인스턴트도 안 먹고, 동물성도 안 먹는다고 하고 내 차랑 과일을 먹고 이분이 뒷마당에서 키웠다는 오이랑 토마토를 먹었다. 아주머니는 러시아어로 말을 하셨고 다리아는 통역을 해줬다. 굉장히 사랑과 정이 넘치시는 분이었는데 우리 방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의 음식을 나눠주고 볼 때마다 이것저것 먹으라고 하셨다.
러시아 사람들은 열차 안에서 이웃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창밖을 보거나, 책을 읽고, 십자말 맞추기, 카드게임, 낮잠, 음주를 한다. 뜨거운 물이 나오니 컵라면이나 뜨거운 물만 부어서 먹는 으깬 감자 같은 인스턴트 제품들과 과자 등을 많이 싸와서 먹는다.
다리아가 내리는 역에서 열차는 약 70분을 정차한다고 했다. 어차피 정차시간도 길고 이젠 자신감도 좀 붙었겠다 오랜만에 좀 나갔다 오는 김에 짐이 많은 다리아를 도와주며 나갔다. 역 앞에서 다리아를 택시 태워 보내고 기차로 돌아왔는데 웬걸, 열차의 출입구가 다 닫혀있었다. 아직 겨우 10분도 안 지난 것 같은데? 열차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을 했지만 영어를 못하고 나는 러시아어를 못했다.
나는 바디랭귀지랑 영어로 이 열차는 내 열차다 나는 여기에 타야 된다를 간절히 말했지만 저 사람들은 니옛(안됨)만 반복했다. 옆을 둘러보다가 그 역의 승무원을 발견하고 달려가서 나는 이 열차에 타고 있고 내 물건이 다 이 열차 안에 있다고 했는데 영어를 못 알아들었고 왜 때문인지 내 휴대폰은 인터넷이 안되었다. 승무원은 뭐를 가리키면서 러시아말을 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다가 내가 저장한 열차 티켓이 생각나서 그 이미지를 찾아서 보여줬더니 다시 러시아말을 하면서 나를 어디로 안내해줬는데 나도 가면서 계속 영어로 어디로 가는 거냐고 하면서 따라갔다.
승무원은 어떤 열차의 문을 열어서 나를 태워줬는데 거기가 내 방이 있는 칸이었다. 열차의 어떤 부분을 떼어낸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정말 설마 여기서 이렇게 눈앞에 있는 열차를 못 타는 것인가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줄 알았다. 내 방에 온 순간 잔뜩 긴장했던 게 풀렸다. 방에 앉아있는 룸메 러시아 아주머니들이 어찌나 반갑던지 내가 밖에서 있었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그분들은 알아들었는지 웃으셨고 나는 그렇게 열심히 주절주절하고 내 침대로 올라가서 누웠다. 이제 멀리 가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마지막 날 내릴 준비를 미리 해놓고 일어나서 간단하게만 짐 싸서 내리면 되겠지 하고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내리기 몇 시간 전부터 룸메 아주머니들이 나를 깨웠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은데 깨우시고.. 나는 시트를 벗기고 승무원한테 돌려줄 것을 다 챙기려고 미리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시작하기도 전에 승무원이 와서 시트, 수건, 컵을 당장 내놓으라고 하셨다 정리를 마치고 내려와서 아래칸에 룸메들과 앉아서 있다가 바카바카(잘 가요) 인사를 하고 블라디보스톡에 내렸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가파른 계단이 있는 아파트 건물의 5층에 있는 숙소를 약 20킬로가 되는 캐리어를 낑낑대면서 들고 올라갔다. 마침내 약 7일 만에 따뜻한 물로 머리를 감고 구석구석 몸을 씻고 나와서 뜨거운 차이 티를 마셨다.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열차에서 그렇게 잤는데도 너무 피곤하게 느껴졌고, 체크인 후 한숨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쑤셨다. 흔들리는 열차가 아닌 곳에서의 생활이 약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러시아어를 할 줄 알았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 사람들과 함께 열차 안에 있었는지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조금 더 재미가 있었을 수도 있고, 새로운 사람들을 더 많이 알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사귀기 위해 열차에 탄 것도 아니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굳이 자세히 알지 못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너무 좋았다. 그리고 아무리 말이 안 통해도 결국 꼭 필요한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된다.
말도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고, 샤워도 할 수 없고, 신선하고 맛있는 음식을 구하기도 어렵고, 화장실은 더럽고, 열차는 흔들리고, 시끄럽고, 인터넷도 안되고, 지루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이 안 통하고 아는 사람도 없기 때문에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 있고, 활동량이 별로 없기 때문에 별로 배가 고프지 않고 필요한 음식은 가지고 타거나 중간중간 사서 먹을 수 있고, 깨끗하진 않지만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 있고, 열차가 흔들리기 때문에 잠이 더 잘 오고, 인터넷이 안되지만 그 대신 인터넷 때문에 방해받아서 할 수 없었던 일들을 할 수 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거나,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기기 같은.
필요할 때, 원할 때 샤워를 할 수 있는 것은 정말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다. 다음번에 또 이 열차를 타게 되는 날이 온다면 적어도 3일에 한 번은 내려야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서의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