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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일살이

응급실마저 조용하고 여유로운 독일

by 미지수

그날의 사고는 볼더 짐에서 일어났다. (볼더링: 높이 3미터 내외로 로프나 하네스 같은 안전장치 없이 하는 암벽등반의 한 종류) 나름 어렵고 힘든 루트를 낑낑거리면서 성공하고 잠시 성취감을 느낀 다음 내려오는데, 팔에 힘이 빠졌는지 떨어지면서 발목이 접질렸다.


여태까지 나는 내가 굉장히 몸을 사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몸에 큰 상처가 없고, 큰 수술을 받은 적도 없었다. 가능한 주삿바늘, 피구공, 치과치료, 다치거나 넘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노력한다. 캐나다에서 번지점프를 한 적이 있고, 암벽등반을 하지만 안전장치가 있으면 대부분의 경우 안전하다. 볼더링이 위험하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그동안은 별일이 없었고, 조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방금 일어난 일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냥 너무 어이가 없었다.


“구급차를 부를까?” 파트너가 물었다.


구급차는 아주 위급한 사람들이 타는 것이 아닌가, 나는 겨우 발목이 삔 것 같은데... 뭔가 창피할 것 같기도 하고... 구급차는 됐고, 병원에는 가야겠다. 걸을 수가 없었다. 파트너의 등에 업혀 차로 가면서, 차를 타고 응급실에 가면서 ‘그냥 구급차를 부를걸 그랬나’ 생각했다.


볼더 짐에서 가까운 병원의 응급실에 도착했더니 앞에 서있던 관계자분이 바퀴가 달린 크고 두툼한 주황색 의자를 가져와서 나를 안쪽으로 옮겼다. 코로나 때문에 보호자는 같이 못 들어간다고 했다. 내가 독일어를 못한다고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안~ 돼~”라고 하면서 의자에 실려 들어갔는데 관계자분은 거기에 맞춰서 “돼~”라고 대답을 하셨다. 파트너는 들어오지도 못하고 차를 빼야 해서 쫓겨났고, 나는 접수대기공간에 놓였다.


간호사는 나보다 먼저 온 팔이 다친 여자아이의 접수를 하면서 팔에 지지대를 대주고 있었다. 아이와 엄마가 어딘가로 이동하고 나서도 나는 그냥 가만히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얼마가 지나고 간호사가 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에 볼더 짐에서 떨어졌다고 하며 아이스 팩과 감싸고 있던 얇은 수건을 떼보니 그새 발목이 더 많이 부어오르고 있었다. 간호사는 얼굴을 찡그리며 “아유 심하게 다쳤네...”라고 말했다. 곧 접수를 해주었고, 옆에 서있던 경호원처럼 보이는 덩치가 큰 직원은 내 의자를 밀어서 문 안쪽 통로 같은 곳으로 옮겨 놓았다.


마치 복도 같기도 한 그 통로의 한쪽 구석이 나의 기다림의 자리였다. 내 쪽에서 보기에 오른쪽엔 벤치가 여러 개 있어서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고, 왼쪽엔 미닫이문이 서너 개 있는데 그 안에는 진료실과 엑스레이 실 등이 있어 종종 문이 열리고 이름을 불러 환자들을 들어오게 했다. 그날 가장 오랜 시간을 기다리며 보낸 그 자리는 인터넷이 죽도록 안 터졌고, 내가 아무리 독일어를 못한다고 해도 독일 노인들은 나에게 자꾸 독일어로 뭐라 뭐라고 말을 시켰다.


다리가 다치고 응급실에 가는 건 계획에 없던 차라 휴대폰은 배터리가 30% 미만이었다. 파트너가 함께 있지 못한 것 역시 예상하지 못했다. 진행상황을 알려줘야 하는데 메시지를 받거나 보내는 것은 잠깐씩 진료실에 들어갈 때, 엑스레이나 CT를 찍을 때 같이 그 자리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가능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될수록 휴대폰을 사용하지도 못하는데 배터리가 점점 줄어가는 게 불안해졌다. ‘언제 끝나는 걸까? 집엔 어떻게 가지? 휴대폰이 꺼지면 어떡하지? 파트너 번호를 아직 안 외웠는데...’ 같은 생각을 하는데 마침 접수를 해준 간호사가 옆을 지나가길래 휴대폰이 곧 꺼질 것 같다고 하니 그럼 병원에 있는 환자용 전화를 쓰면 된단다. 번호를 못 외웠다니까 종이랑 펜을 가져와서 종이에 번호를 적어서 주고 갔다.


대략 따져봤을 때 응급실에서 서너 시간 정도 보낸 것 같다. 하염없는 기다림... 잠깐 진료실에 들어가 의사가 다리를 보더니 엑스레이를 찍자고 했다. 다시 같은 자리에서 기다림... 잠깐 엑스레이 실에 가서 촬영을 했다. 또다시 기다림... 인터넷도 안 되는 자리에 혼자 가만히 있다가 뭔가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응급실이라기에 그곳은 너무 조용하고 여유로웠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급성 위염 때문에 한밤중에 응급실에 갔던 적이 한 번 있다. 그때도 너무 아파서 선명하게 기억이 나진 않지만 여기저기에서 울거나 소리를 지르고 의료진들도 바삐 움직였다.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항상 정신없고 시끄러운 곳으로 묘사된 장면들도 떠올랐다.


의사가 나한테 오더니 뼈가 부러졌다고 CT를 찍어야 된다고 말했다. “뭐라고요? 뼈가 부러졌다고요?” 뼈가 그렇게 쉽게 부러지는 것인가... 뼈가 부러지면 더 아파서 가만히 있지도 못할 줄 알았는데... 놀란 나에게 의사는 별로 심각한 건 아니라고 했지만 충격과 어이없음은 그대로였다. 멍하게 있다가 잠시 뒤에 CT실에 가서 찍고 또 기다렸다. 진료실에 들어가니 의사가 부러진 뼈 사진을 보여주면서 수술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진단서와 내일 전화해서 수술 날짜를 잡을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봉투에 담아주면서 이런저런 설명을 하고, 더 이상 질문이 없다고 할 때까지 계속 더 궁금하거나 물어볼 것이 있는지 물었다. 이제 깁스를 하고 집에 가면 된다고 했다. ‘집에 가라고? 뼈가 부러졌는데?’


깁스를 하러 갔는데 스포츠 레깅스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깁스를 하고 나면 그걸 벗을 수 없다... 혹시 바지를 갈아입어도 되냐고 물었다. 간호사는 바지를 벗거나 자를 수 있다고 했다. 이건 내가 좋아하는 나의 유일한 스포츠 레깅스이고... 자르고 새로 사면 또 낭비이고... 같은 디자인을 찾기도 어려운데! “으악... 혹시 바지 좀 빌릴 수 있나요?” 잠시 고민하더니 간호사는 병원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연두색의 허리끈만 있는 아주 커다란 바지를 가져와 돌려주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며 나에게 주었다. 깁스는 독일어로도 깁스다. 곧 깁스가 마르고 이제 집에 가도 된다고 해서 아까 의사 선생님한테 말해서 받은 환자용 전화로 파트너한테 전화를 했다. 처음으로 목발을 짚으면서 맨발로 응급실 입구 쪽으로 나갔다. 타이밍 좋게 내가 나갔을 때 파트너가 바로 앞에 와있었다. 처음에 내 의자를 밀어준 분께도 인사를 하고 차에 탔다.


집으로 가는 내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들만 맴돌았다.

‘세상에... 믿을 수가 없어... 이게 무슨 일이야... 참나... 어이가 없다...’

21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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