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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erkat Oct 17. 2019

선택에 관하여

과정을 ‘함께’하고 ‘책임’을 나누는 선택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에 있는 C(choice)이다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내려온 지, 반 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여기서는 ‘선택’을 많이 하게 됩니다. 앞에서 인용한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가 말한 문장이 새삼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요. 선택을 하면서 ‘옳고 좋은’ 선택은 무엇이고, ‘유익한’ 선택은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게 됩니다. 선택을 한 이후에도 계속 고민하면서 하지 않았던 선택을 후회하기도 하죠. 갑자기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가 떠오르네요.      


사실 오늘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하는 개인적인 고민과 선택은 그다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선택이라는 행위와 결과가 개인이 아니라 구성원 혹은 공동체에게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에 그 선택이 옳고 좋은지, 유익한지를 유심히 따져보고 결정해야 합니다. 


만약 투명인간이 된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선택을 했을 때 유익한 결과가 나오리라 희망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부정의한 선택이 유익하며, 정의로운 선택은 손해를 준다고 인식합니다. 만약 투명인간이 될 수 있는 반지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행동할까요? 여기서 플라톤 『국가』에 나오는 기게스의 반지(Gyges’s Ring) 이야기를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옛날 리디아인 기게스는 당시 통치자에게 고용된 목자였습니다. 어느날 심한 뇌우와 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땅이 갈라져 틈이 생겼습니다. 땅 아래로 내려간 기게스는 사람보다 더 큰 송장의 손가락에서 금반지를 빼서 밖으로 나옵니다. 기게스는 우연히 반지의 보석받이를 자신의 손 안 쪽으로 돌렸는데, 곧 바로 자기가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를 알게된 기게스는 반지를 활용해 왕비와 간통을 하고, 왕을 살해하고 왕국을 장악합니다.


만약 기게스의 반지가 두 개 생겨서 하나는 올바른 사람이, 다른 하나는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끼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플라톤은 글라우콘의 입을 통해 올바른 사람이나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나 양쪽 다 나쁜 방향으로 갈 것이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올바름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것, 즉 이득이 못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선택하는 것은 처벌을 면하기 위해서나 주위의 평판을 두려워하여 마지못해 하는 선택으로서, 만약 완벽하게 부정의를 행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정의보다는 부정의를 행한다는 것입니다. 아무튼, 플라톤은 『국가』전체에 걸쳐서 정의로운 것을 그 자체로서도 좋고 결과로도 좋은 것임을 논증합니다.


플라톤과 키케로, 그리고 마키아벨리


정의로운 선택을 바라보는 다른 시선들도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철학자 키케로는 『의무에 관하여』에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유익하다”고 주장합니다. 이를 선택의 문제와 연관지어보면, 정의롭고 선한 선택은 유익한 선택이 되고, 부정의한 선택은 유익하지 않은 선택이 되겠네요. 하지만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 철학자 마키아벨리는 옳고 선함, 즉 정의로운 선택이 항상 유익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마키아벨리는 때때로 부정의하고 악한 행동이 유익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며, 인간(또는 군주)은 ‘필요하다면(또는 유익하다면)’ 악덕을 행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선택은 ‘책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정의로운 것,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계속 고민하다보면 혼란스러워집니다. 2010년 한국에 출판됐던 마이클 샌댈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어보신 분은 느끼실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정치적, 윤리적 딜레마적 상황에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보편적인 정의관에 따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현재의 선택이 미래에 유익할 것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요? 


선택은 '책임'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선택 그 자체의 정의로움과 결과로서의 유익함을 따지기보다는, 오히려 선택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의견을 나누었고 함께 결정했느냐, 그리고 결정한 선택에 대한 우리가 얼마나 ‘책임’을 나누었는가를 따져야 합니다. 우리는 과정을 ‘함께’하고 ‘책임’을 나누는 선택을 해야 합니다.


점점 기울어가는 냉장창고를 새로운 곳으로 옮기기 위해 가족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집 뒤로 옮기자, 집 앞 자투리 공간으로 옮기자, 석축을 쌓아 땅을 높인 후 그곳으로 옮기자는 의견 등... 많은 의견들이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21세기에 아직 이런 방식으로 일해야 하나 싶을 정도로, 주말마다 가족들이 모여 주춧돌이 될 큼직한 돌을 나르고, 한 삽 한 삽 흙을 퍼나르고 있습니다. 


이 선택은 옳고 좋은 선택일까요? 유익한 선택일까요? 결과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택의 과정에서 ‘함께’ 문제를 생각하고 의견을 나누고,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지는 선택을 했다는 점에서 좋은 선택이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앞으로도 많은 고생은 있겠지만... 



고작 냉장창고를 하나 옮기는 문제를 가지고 플라톤과 키케로, 마키아벨리까지 끌어들였습니다. 더 쓰려다보니 저들을 더 건드려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형적인 용두사미의 글이네요. 아무튼, 뭔가 거창한 것 같아 보이지만, 거창하게 여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어쩌다 시골]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앞으로 이 시골에서 겪은 경험과 떠오르는 생각을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남겨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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