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짝이는 상상들이 현실이 될 때
해본 것 없음, 가본 곳 없음, 특별한 일 없음! 아직도 상상만 하고 계신가요? 자신의 꿈은 접어둔 채 16년째 ‘라이프’ 잡지사에서 포토 에디터로 일하고 있는 월터 미티. 해본 것도, 가본 곳도, 특별한 일도 없는 월터의 유일한 취미는 바로 상상! 상상 속에서만큼은 ‘본 시리즈’보다 용감한 히어로, ‘벤자민 버튼’보다 로맨틱한 사랑의 주인공이 된다. 어느 날, ‘라이프’지의 폐간을 앞두고 전설의 사진작가가 보내 온 표지 사진이 사라지는 일이 벌어진다. 당장 사진을 찾아오지 못할 경우 직장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하게 된 월터는 사라진 사진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연락조차 닿지 않는 사진작가를 찾아 떠난다. 지구 반대편 여행하기, 바다 한 가운데 헬기에서 뛰어내리기, 폭발직전 화산으로 돌진하기 등 한 번도 뉴욕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월터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상상과는 비교도 안 되는 수많은 어드벤처를 겪으면서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하게 되는데...당신이 망설이고 있는 그 순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출처: 나무위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中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가 있다. 영어 원제인 "월터의 비밀스러운 삶"과는 다소 거리감이 있는 번역 제목이지만 스토리의 여러 가지 요소를 고려했을 땐 적절한 의역이었단 의견이 다수다. 내가 보지 않은 영화이기에 나무위키에서 시놉시스를 가져다가 붙여넣기 해놓았다. 특별한 일 없이 눈에 띄지 않는 한 명의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던 월터 미티의 삶이 우연한 계기를 바탕으로 180도 달라지는 전개라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번역 제목을 보고 흔히 떠올리는 것처럼 월터가 상상했던 일이 가만히 앉아있어도 초능력처럼 현실에 펼쳐지는 스토리는 아니란다. 이 작품은 판타지보다는 어느 소시민의 성장담에 가깝다는 것이 나무위키의 총평이다. 그런데 왜 내가 연인에게 바치는 글을 쓰면서 하필 내가 감상하지도 않은 이 영화를 인용했을까? 그 이유는 바로 번역 제목에 있다.
내 애인 냥이는 우리 관계를 막 시작할 즈음부터 로맨틱한 상상들을 나와 공유하고 있었다. 그 상상에는 100일 기념 커플링 맞추기, 200~300일을 넘어 계속해서 사랑을 이어가기, 연애 초반의 불 같은 감정과는 '다른 좋음'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나의 폭넓은 세계관에 따라 뛰어들어 발발발발 구경하고 다니기, 그리고 동거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까지 다양한 비전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반년 남짓 연애를 이어오고 있는 우리지만 그 사이에도 현실로 이루어진 상상들이 많다. 우리가 100일에 맞추어 주문한 커플링은 현재 우리의 카톡 프로필 배경 사진이 되어있다. 커플링을 낀 내 손 위에 역시 커플링을 낀 냥이의 손이 올라가있는 모습을 찍은 사진 말이다. '다른 좋음'도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꽤 만족스럽게 누리고 있는 참이다. 냥이가 농담 삼아 "걸어서 세계 속으로" 모먼트라고 말하는 서울 각지의 데이트 코스 또한 열심히 도장깨기를 하는 중이다. 그 사실을 증명하는 사진들이 각자의 폰과 인스타그램에 쌓이고 있다. 월터, 아니 우리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정말이다.
또한 우리에겐 지금까지 현실이 된 상상들 외에도 앞으로 이루어갈 꿈들이 존재한다. 일단은 각자의 리즈 시절을 되찾는 다이어트와 그에 걸맞은 버킷리스트인 커플 스냅샷 촬영이라는 공동 목표가 있다. 머지않아 가능할 것으로 보이는 나의 에세이집 출판과 그보다는 넉넉히 연 단위로 기간을 잡아야 할 냥이의 추리소설집 출판이라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커플다운 목표 또한 존재한다. 그리고 어제인가, 우리는 올해 10월 9일에 있을 1주년 기념일을 어떻게 보낼지 머리를 맞대고 생각했었다. 그에 대한 베스트 아이디어는 작년 10월 9일과 똑같이 보내자는 것이었다. 점심식사 후 냥이의 단골인 타로 마스터님의 가게와 마사지샵의 서비스를 이용하기. 냥이의 단골 카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냥이가 내게 고백했던 천호의 버스 정류장에 나란히 서보기. 그리고 구리시의 구월서가와 그 옆의 카페 반했나봄에 다녀오기. 1주년 이후로는 두번째로 함께 보내는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풍경을 그릴 수 있다. 더 멀리는 우리가 가끔 언급하는 동거와 결혼에 대한 청사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글의 첫 문단에서 나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라는 영화가 흔히 오해받는 지점과 스토리의 진짜 의미에 대해 간략히 적은 바 있다. 이 영화의 장르가 판타지라기보단 성장담에 가깝다는 세간의 평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한 평이 사실이라면 우리의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과정 또한 월터 미티를 따라가는 셈이다. 그저 가만히 앉아 로맨틱하고 따스한 사랑의 모양에 대해 상상만 하면서 저절로 그와 같은 연애가 눈앞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형국이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는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던 순간부터 그 사랑의 모양을 예쁘게 빚어가기 위해 노력을 해왔다. 나는 다가갔고 냥이는 선택했다. 두 가지 일엔 모두 용기가 필요했다. 우리에게 용기가 없었다면 이 관계는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영화의 스토리와 우리의 실제 삶 사이에는 크나큰 차이가 있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존재하는 픽션이지만 우리의 연애에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시점은 머나먼 앞날일 거란 사실이다. 우리의 상상은 지금도 태어나고 있는 우주의 별들처럼 끝없이 솟아나겠지. 냥이와 나는 눈앞에서 반짝이는 상상들을 데려와 현실의 삶에 녹여낼 거다. 서로를 마주보았던 날들보다 앞으로 그리할 날들이 훨씬 더 많은 우리의 삶 속에.
(2023. 4.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