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업 52일 차
완도살롱을 함께 운영하고 있는 K와 나는 고향 친구이자 중, 고등학교 동창이다.
학창 시절에는 방학 때마다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뙤약볕 아래에서 공병을 정리하기도 했고, 땀으로 옷이 다 젖을 때까지 아이스크림을 나르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우리는 고깃집에서도 같이 일을 했다. 그 당시 시급은 4천 원 정도였는데, 일당으로 4만 원을 받으면 양념 통닭을 사 먹는데 그 돈을 다 쓰고는 했다.
K는 끈기가 좋았고, 나는 체력이 좋았다. 하지만 각자 다른 지역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우리는 더 이상 아르바이트를 같이 할 수 없게 되었다. K가 서울에 있는 회사에 취업을 한 후에야 다시 어울릴 수 있었다.
비슷한 시기에 학창 시절부터 친했던 또 다른 친구가 서울에 자리 잡으면서 우리는 셋이 되었고, 이 셋은 서른이 되자마자 약속이나 한 듯 각자의 갈 길을 갔다. 나는 홀로 서울에 남았다.
가장 늦게 서울에 온 녀석은 직장을 얻어 원주로 갔다. K는 낚싯대를 메고 세상을 떠돌더니 이름도 생소한 완도라는 곳에 정착해버렸다. K가 도망치듯 서울을 떠난 것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회사생활이 도저히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이었고(그래서 K는 직장에 사표를 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아버지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K는 아버지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도 그렇지. 우리는 왜 하필 몇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완도냐고 물었다. K는 완도가 낚시꾼들의 천국이라고 했다. 고기를 낚는 것이 그렇게 좋으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도 했다. 그렇게 바람처럼 땅끝으로 떠나버린 그를 다시 만난 것은 2017년 봄이었다.
완도는 정말 먼 섬이었다. 다행히 지금은 육지와 섬을 잇는 다리가 놓여 고속버스로 갈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다섯 시간이 꼬박. 뭐 이런 곳에 살고 있냐며 툴툴대던 우리를 K는 맛있는 회와 해수욕장의 비경으로 달랬다.
K를 다시 만난 건 그가 완도에 정착한 그해 가을이었는데 그때는 내 상태가 온전치 못했다. 정신적으로 너무나 힘들었고, 삶의 모든 것들이 불안정하고 불투명하게 느껴졌다.
나는 다짜고짜 K에게 전화를 걸어 "서울을 떠나고 싶다. 완도에 갈 테니 뭐 일할 곳이 없는지 알아봐 달라."고 했다. K는 흔쾌히 그러겠노라 답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게스트하우스의 온라인 마케팅 업무는 어떻냐는 것이었다. 망설이거나 잴 것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완도로 갔다. 면접은 일사천리였고, 나는 매일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게스트하우스 건물의 2층 카페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먹고 자는 일은 K의 집에서, 서울에 남겨두고 온 오피스텔은 금세 다음 세입자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무렵 K는 택배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회사 생활이 썩 만족스럽지 않은 듯했다. 때마침 내가 일하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새로운 직원을 구했고, 나는 K를 게스트하우스로 끌고 왔다. 우리는 10년 전 고등학생 때처럼 다시 같은 공간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는 채 세 달을 채우지 못하고 그곳을 나왔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동업 일기 (2)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