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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Oct 10. 2021

타인의 고민이 내 것이 되지 않으려면

해줄 수 있는 것과 해줄 수 없는 것

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잘 지내냐는 안부 인사다. 지난 여름방학 취업 프로그램을 통해 알게 된 총 60여 명 중의 한 명이다.  그래도 학생들의 연락은 늘 반갑기에 0.1초 만에 "너도 잘 지내니"라고 회신을 보낸다.  나의 지체 없는 반응에 신이 났는지 이런저런 본인의 근황을 늘어놓는다.  일종의 직업병이겠지만 그 말에 장구를 맞춰  대화 공백이 생기지 않도록 빈틈없이 질문세례를 퍼붓는다.  


불과 2개월의 인연이 전부인 데다 세대도 한참 다른 나에게 연락을 먼저 하기까지 -적어도 내성적인 내 세계관에서는- 이 친구에게도 꽤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짐작되기 때문이다.  시시콜콜한 근황 토크를 주고받는 와중에도 내심 걱정이 앞선다.  학생과 내가 평일 밤에 느닷없이 이런 대화를 나눌 정도의 가족도, 친구도, 선후배도 아니기 때문이다.  본론이 등장할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다.




대개 학생들이 나를 찾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이다.

'내 안부가 궁금하거나 혹은 도움이 필요하거나'


물론 비중으로 치면 후자가 전체 95% 이상이다. 전자는 취업한 후 내게 밥을 사겠다고 하거나 드물게 나라는 사람에게 큰 인간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경우다.  


어쨌든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도움의 종류도 두 가지로 나뉜다.

당연히 첫째는 '취업 관련 고민'이다. 이 부분은 내가 가장 마음 편하게 그리고 자신 있게 도와줄 수 있기에 심적 부담이 거의 없다. 하지만 다른 한 가지 이유인 '심리적 불안'은 나 또한 쉽게 풀 수 없는 영역이기에 덩다라 긴장될 수밖에 없다.  관련 분야의 전문 지식은 고사하고 별도의 교육을 받은 적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내가 선생님이니까 '뭐라도 도움이 되겠지'라는 마음에 무작정 하소연을 듣기 일수였지만 사실 그 이후에 나는 어김없이 번아웃(Burn-Out)을 경험한다.


취업 상담이라고 해도 학생이 처한 저마다의 사연까지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정불화, 경제적인 곤란, 대인관계 어려움, 학교 적응 문제와 성격적 불만 그리고 죽고 사는 연애사까지도 취업 상담 현장에 소재로 등장하곤 한다.  꼭 그런 이야기를 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학생 스스로 취업할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가'를 처한 상황을 통해 먼저 파악하는 것이 본격적인  취업 코칭을 하기 위한 나만의 상담 루틴이 되었다. 물론 그때는 대개 전문가가 아닌 '한 사람의 어른'이자 '인생 선배'로서 조언하고 격려하는 것이 나로서는 최선이라고 여길뿐이다.

 

문제는 이런 나도 감정의 수용량이 정해져 있는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거다.  

흐느끼는 학생의 어깨를 토닥이고, 불행의 원인을 함께 탓하며,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사연에 한없이 공감한 후에는 나의 심신에도 빨간 불이 켜진다. 타인의 고민을 담을 수 있는 서랍에서 용량 초과를 경고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내면은 감정의 찌꺼기가 비워질 때까지 무기한 심연으로 가라앉는다.  


비단 비극적인 내용이 아니더라도 타인의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일에만도 상당한 에너지가 든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에 더해 깨달은 것이 있다면 그렇게 쓰인 에너지는 좀처럼 완벽하게 원상복구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불행에 노출될수록 나의 영혼도 아주 조금씩 침체되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선생님은 우울함을 어떻게 극복하세요?"


드디어 본론 제목이 정해지는 순간이다.

내가 우울함을 극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궁금할 리 없다.

저 질문은 '저 지금 많이 우울해요. 도와주세요'로 동시 번역 가능하다.


"어.. 뭐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왜 요즘 우울해?"


"저는 요즘 사실 너무 우울해서.. 약에 의존하고 있어요"


현대인의 우울증은 감기처럼 흔하디 흔한 심리 증상이라고 하지만 아직 사회에 진출도 안 해본 어린잎 같은 청년들의 우울함은 지금 내가 사는 '이 사회의 미래가 우울하다'로 들리기 때문에 간과하기 어렵다.  

물론 공들여 작성한  긴 메시지 아니면 짧은 전화 통화로도 충분히 진심 어린 위로나 조언을 할 수 있겠지만 왠지 그러면 안될 것 같다.


 '지금 이 나라의 미래가 현재가 우울하다고 말하지 않는가'


무언가라도 해야만 한다라는 사명감에 결국 큰 보폭으로 성큼 앞서 나가 내 영혼을 또 조금 떼어주는 일을 제안한다.


"그러지 말고, 우리 만나서 이야기할까?"


"먼저 그렇게 말해주셔서 감사해요. 선생님"


학생의 기꺼운 반응에 잠깐이나마 수동적으로 조언하고 마무리하려 했던 순간이 미안해진다.   

하지만 묘수가 있지도 않는 상황에서 내 머릿속은  어떤 말을 해줘야 이 친구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으로 혼란스럽다.

어른이랍시고 무턱대고 상대의 '큰' 고민을 끌어안으려 했던 것이구나를 깨달은 순간은 이미 약속 일시가 정해진 이후였다.  무책임한 취소는 학생에게 또 다른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 친구를 만나는 일이 내게는 넘어야 할 큰 산이 돼버렸다.  

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괜히 만나자고 했나' 싶은 후회가 밀려온다.  내가 뭐라고 그 친구가 안고 있는 구체적인 문제가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리고 만약 그것을 알고 났을 때 끝까지 책임을 질 자신도 없으면서 어쭙잖게 만남을 제안했을까 싶다.


학생에게는 내가 아닌 심리 전문가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의 어설픈 조언이 오히려 독이 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나는 학생을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만남 이후에 또 한 번의 마음의 감기를 앓을 것이다.


부끄럽지만 나는 타인의 모든 종류의 불행을 함께 안아줄 만큼의 도량이 깊은 사람이 아니다.

이 사실을 빨리 인정해야만 나 자신을 지키고, 타인의 상처가 더 벌어지는 일도 막을 수 있다.


결론적으로 내가 해줄 수 있는 일과 그렇지 못한 일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이

어른으로서, 선생님으로서  내가 학생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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