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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그레이 Jul 07. 2023

'오래'보기 위해 '오랜만에' 만나면 안될까요?

자주보다는 길게요.

결국, 내 발등을 내가 찍고 말았다.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과 충동성의 콜라보였다.  


코로나로 지난 4~5년여간 보지 못했던 오랜 지인들과의 급 만남이 성사됐다.  '반가운 마음'이 크게 앞선 나머지, 낯선 동네까지도 한 달음에 달려갔다.

 

못 본 사이에 누구는 외모가 크게 바뀌어 있었고,

또 누구는 크게 병치례를 한 번 겪었으며,

또 다른 누구에게는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


거기에 맛있는 술과 음식까지 더해지니 갑작스러운 만남에도 서로를 향한 그간의 그리움과 애정으로 가득 찬 풍요로운 시간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대 전제가 있었다.


'또 언제 볼지 모른다'


그래서 더욱 애틋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멤버 중 한 명이 충동적인 제안을 하고 말았다.


"이렇게 좋은데, 우리 정기적으로 보는 건 어때?"


나를 제외한 대다수가 '그러자~'라고 답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라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지만  내뱉지는 못했다. 좋은 분위기를 괜히 망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사이 이미 모임 주기는 분기에 한 번으로 확정되었고, 다음 안건인 회비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아뿔싸...'


반기에 한 번도 부담스러운데 분기라니.

게다가 뭐가 됐던 타의로 정해진 무언가에 나를 맞추는 데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다.  


몇 시간 전만에도 최근 몇 년 중 가장 신났던 모임이

한순간에 공포가 되고 말았다.


설상가상 이 모든 걸 주관하는 1년 차 '회장'에 평소 적극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탓(?)에 내가 지목됐고,

얼떨결에 덥석 직책까지 떠안고 말았다.






예상대로 3개월은 눈깜짝할 사이에 돌아왔다.


잘 안 쓰는 내 계좌를 회비통장으로 지정하고, 모두의 요구에 따라 장난스럽지만은 않은 자잘한 모임 수칙까지 정하고, 때가 됐을 때 모임일시와 장소를 투표로 결정한 뒤, 모임 당일에 사용한 금액을 세세히 정산하여

단톡방에 공유하기까지의 모든 과정에서 내 머릿속은 온통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이걸 원한게 아닌데...'


그저 타고난 몹쓸 책임감이 주도하는 대로, 내 영혼은 무기력하게 끌려다니고 있었다.


'왜 거절하지 못했을까..'


후회하고 또 후회 중이다.

호감있는 상대의 기분에만 맞춰 행동하는 습관이 가끔 독이 될 때가 있다.  여태 제대로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4~5년 만에 만났다는 반가움마저 빠르게 식었다. 

다음 모임은 내게  어떤 기대감도 주지 않는다.


선택의 갈림길이다.





여행객에게 '파리'는 '환상적'인 도시이다.

짧은 체류 기간과 또 언제 오게 될지 모르는 막연함 때문에 파리에 대한 애틋함은 하늘을 찌른다.  오감으로 느끼는 모든 것들에 의미가 싹튼다.


같은 맥락에서 정해진 만남은 낭만적이지 않다.

서로 바쁘게 살아가다 '어쩌다', '문득 그리워서' 우연히 만나게 됐을 때의 짜릿함과 설렘이 이렇게 간단하게 사라져 버리다니 아쉽고, 또 아쉽다.


나이를 먹고 보니 120분짜리 영화 같은 관계보다

3분짜리 영화 예고편 같은 관계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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