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지방관리들의 폐해를 쇄신하기 위하여 목민관 관리의 부임부터 해임까지 반드시 준수해야 할 조항들을 정리해 놓은 책은?"
'유 퀴즈'가 시작되면 나는 출연자라도 되는 것처럼 마른침을 삼킨다. 자신 있는 문제라면 누군가 들어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허공을 향해 다자꼬짜 정답을 외치겠지만, 이번 문제는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겠기에 평소보다 더 차분한 시청자 모드가 된다.
"목민심서!"
라는 외침이 TV 속 출연자가 아닌 집 안의 저편에서 들려온다. 남편이었다.
듣고 보니, '올타커니!' 싶다. 남편에게 묻는다. "우리 여보 똑순이! 어떻게 알았어??"
"학교에서 배웠잖아. 그리고 질문에 목민관이라는 힌트도 있고"
'유 퀴즈'를 포함하여 각종 예능의 단골 포맷인 '퀴즈'가 나올 때면 반복되는 풍경이다.
나는 대부분 아리송해하고, 남편은 대부분 명쾌하게 정답을 외친다. 남편과 나는 2살 차이로 사실상 같은 세대나 다름이 없거늘 남편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하는 교육과 내가 배운 그것은 어쩐지 달라도 너무 다른 것 같다.
'목민심서, 나도 아는데.. 주관식 답에 나도 써봤는데..'라고 자위해봐야 그렇다면 '목민심서가 다루고 있는 내용은?'이라는 질문에는 답했을까?라고 묻는다면 부끄럽지만 그것도 아니다. 결국 나는 목민심서가 '책'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학교에서의 기초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절히 깨닫고 있는이유다. 습자지 같은 지식으로 용케 이 나이까지 사람 구실 하면서 버텼다 싶다. 나의 지적 기반이 사실상 모래성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분야는 정치, 사회, 경제, 과학에 걸쳐 다방면에 분포되어 있다. 모두 학창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하고 심지어 높은 성적도 받았던 과목들이다.
문제의 원인은 '주입식 교육'에 있었다.
요즘에도 이런 말을 쓰는지는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주사기 용액을 체내에 흘려보내는 일방적인 방식의 교육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입식 교육'의 가장 큰 학습 자질은 '암기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수업이 시작 되면 가로폭이 자그마치 서장훈 키만큼은 되는 칠판 빼곡히 선생님의 '묻지마 판서'가 좌에서 우로 시작되곤 했다. 그러면 일찌감치 다른 큰 뜻을 품은 일부 공부 포기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숨죽여 노트에 옮겨 적었다. 학습역량과 팔근육이 비례하는 느낌이 드는 지점이다. 그 과정에서 나오는 질문은 기껏해야 "선생님, 무슨 글씨인지 모르겠어요.", "선생님, 잘 안 보여요" 정도가 전부다. 그러니 내용을 곱씹을 여유따위는 없는 것이다. 선생님은 적었고, 우리는 받아 적고 외웠을 뿐이다.
(선생님은 왜 인쇄물로 나눠주지 않았던 걸까?)
그러다보니 연습장 몇 권을 깜지로 만들어가며 밤새워 공부를 했어도, 시험 종료 벨소리와 함께 그 모든 지식은 손소독제처럼 증발돼버렸던 것이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따로 없다.
교육이란 당신이 배운 것에서 잊어버린 것을 뺀 나머지다 니체 (1844-1900)
아담 스미스 '국부론', 마키아벨리 '군주론', 칼 마르크스 '자본론' 저자명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명저들이지만 나는 최근에서야 '국부론'이 'Wealth of Nations'라는 사실을 알았다. 원서의 제목만으로도 '국가의 부'가 주제임을 단번에 파악이 되거늘, 사지선다에서 아담 스미스-국부론을 짝짓기 하는 데만 열을 올렸을 뿐 그 책이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만들기 위한 고민에서 시작된 오늘날의 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의 기본이 되는 저서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변명이지만 그런 맥락을 알았더라면 공부가 훨씬 더 쉬웠을 것 같다.)
물론 학교 교육만 탓할 수는 없다. 당시 유사한 환경에서 교육을 받았던 남편이 나와 전혀 다른 이해 수준을 보유한 것으로 봐서는 명석함의 정도에 따른 개인차가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나의 우둔함이었군..) 그리고 부모님의 경제, 교육 수준 및 자녀에 대한 교육 철학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 부분은 내 입장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있기 때문에 좀 낫다.
그깟 예능 퀴즈 좀 못 맞힌다고 해서 사는데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맞다.
그렇지만 마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을 나 혼자만 모르고 있는 기분이 들어 영 개운치 않다. 무엇보다 그런 영향으로 내가 접하는 미디어, 책 등을 통한 다양한 관심 콘텐츠의 '행간의 의미'를 자주 놓치는 탓에 밥을 먹기는 하지만 씹지 않고 그냥 넘기는 것 같아 소화불량이 걸릴 것 같다.
교육이란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가는 과정이다 윌 듀란트(1885-1981)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내 인생의 모토이기 한 '모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서 출발한다. 모른다는 사실을 쿨하게 인정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배움'에 대한 용기가 저절로 샘솟는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배우는 방법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뿐이다. 보통 뭔가를 배우려고 하면 정식 기관에서의 유료 교육 같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방식을 연상한다. 그런 형태가 본인 성향에 잘 맞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연초에 반짝 등장했다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 같은 결심을 볼모로 한 계획은 무용의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세상에 고정불변이란 없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모든 것은 변모하기 때문에 교육의 방식도 과거의 것을 반드시 답습할 필요는 없다. 특히, 요즘 같은 '다채널 플랫폼 시대'에 구태여 따분한 강좌, 책을 붙잡게 된다면 내 인생에서 힘겹게(어쩌면 난생처음) 발견한 '배움의 불씨'를 발로 짓뭉개 꺼버리는 것과 같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학습 도구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과정에는 당연히 시행착오가 있을 수 밖에 없다. (나 역시 그 과정을 통해 동영상보다는 책이 가장 효과적인 교육 도구라는 것을 깨달았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는 말처럼 지금 모르는 것을 급하게 깨우치고 나면, 그로 인해 또 다른 무지(無知)를 자각하고 또 다른 배움을 추구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반복되는 여정을 기꺼이 즐길 준비가 되어 있다면 매일이 똑같아보이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남은 인생의 질을 높일수 있는 요긴한 지혜를 얻는 순간이 오리라 확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