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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Feb 24. 2019

"정신과 상담을 받는 건 어때? 우리 와이프도 그랬어"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4

마침 페이스북에 접속해 있던 지인분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전 직장에서 비즈니스로 몇 번 미팅을 가진 적 있는 팀장님이다. 새해를 맞이하는 소중한 순간을 기꺼이 나를 돕는데 할애하신 팀장님은 《콰이어트》, 《신경끄기의 기술》,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란 책 세 권을 추천해주셨다. 작금의 나는 조용히 신경을 좀 끄고 행복해질 필요가 있으니 명약을 주신 셈이다.


“인터넷으로 주문하면 3일은 지나고 오니까 아침 되면 바로 서점에 가세요. 그리고 읽으세요.”


나는 책을 좀처럼 읽지 않는다. 책 읽기를 얼마나 싫어하냐면 학창 시절에는 영어 단어책도 읽지 않으려 해서 결국 녹음 파일을 들으며 외웠다. 하지만 그날 웬일인지 나는 무작정 팀장님 말에 따랐다. 기분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날은 연말 정산 시즌이라 퇴근하고 전 직장에 원천징수 서류를 받으러 찾아갔다. 늦시간이었는데도 대표님이 일하고 계셨다. 제주도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자 대표님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작게 말씀하셨다.


정신과나 심리 상담 같은 거 받아봐.


대표님은 예전부터 신통방통한 데가 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마음 닫지 말고 넓게 봐야 해. 내가 볼 땐 너한테 숫자도 어울려.”


입사 한 달 반이 되던 날, 숫자가 싫어서 지금 팀에 있는 게 천만다행이라는 내 말에 대표님은 뜻밖의 말을 하셨다. 그것 참 비현실적인 조언이라 생각했던 나는 얼마 안 가 팀을 바꾸고 진짜 적성을 찾았다. 숫자가 전부인 팀이었다.


“내가 너한테 계속 말했지. 자신감. 자신감을 가져. 꼭.”


나는 자신감이 과해서 문제인데 뭘 모르신싶었지만 또 대표님이 옳았다. 나는 결국 그놈의 자신감이 족쇄가 되어 회사를 떠났다. 그래서 나는 더이상 대표님의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다.


예전처럼 안 살래요. 회사가 준 목표는 꼭 달성해야 하는 건 줄 알았는데 그거 달성 안 한다고 지구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회사가 망하는 것아니더라고요. 제 몸만 상했어요. 이제는 아무 의욕도 없어서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기대가 안 돼요. 툴툴대는 내게 대표님은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야. 내가 너를 아는데 너는 열심히 하고 잘하고 싶어 하잖아. 상담을 받으면 네가 받는 압박을 건강하게 즐기면서도 목표까지 달성하는 방법을 깨닫게 될 거야.”


사실 작년 여름, 심리 상담을 알아본 적이 있었다. 불면증으로 괴로워하는 나를 본 동료가 집 근처 심리 상담소 번호를 찾아 주었기 때문이다. 내일 오전에 꼭 전화하고 나한테도 다시 이야기해. 신신당부하는 그녀의 마음 씀씀이를 외면할 수 없어 트라우마 전문 상담소라는 그곳에 전화를 걸었다.


저...여긴 트라우마 상담하는 곳이라고 하던데 저처럼 그냥 직장 생활에서 겪은..
 좀 사소하게 보일 수 있는 일도 접수가 되나요?


상담원은 감정 없는 목소리로 “그런 건 상관없는데 1회 10만 원이고 9월 말까지 예약이 차 있습니다. 그래도 하실래요?”라고 물었다. 아… 아니요. 역시 비싸구나. 9월 말이면 석 달은 지나야 한다. 그때쯤이면 자가 치유되어 있지 않을까? 머릿속에서 계산기가 돌아갔다. 사실 마음이 너무 너덜너덜한 상태라 상담 선생님에게 털어놓고도 오히려 상처받는 일이 생길까 두렵기도 했다.


결국 나는 혼자 이겨내 보기로 하고 심리 상담 대신 2박 3일 봉사 활동 캠프를 떠났다. 그곳에서 나는 봉사의 기쁨으로 상처가 치유되는 기적의 그림을 기대했지만 마지막 날 밤 자기소개를 하다가 펑펑 울어버렸다.


“저는 심리 상담을 알아보다가 사정상 스스로 고쳐 보려고 여기 왔는데요. 눈물이 계속 나는 걸 보니까 아무래도 병원에 가야겠네요.”


울면서 하는 내 농담에 다들 웃었다. 하지만 나는 그 뒤로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대표님을 만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동료들과의 치킨 모임이 있었다. 우리는 나이도 사는 곳도 하는 일도 제각각인데 어쩌다 보니 치킨 아래 하나가 되었다.


나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어.


하하 호호하던 와중에 한 분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자 나는 내심 긴장했다. 아마 스트레스 받지 마라, 회사에 너무 몰입하지 말아라 같은 말을 하시겠지. 나는 어른들에게 그런 말을 자주 듣는다. 회사 말고 네 인생을 살아.


“몇 년 전에 우리 와이프도 그랬어.”


하지만 그분에게서 흘러나오는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초기에 빨리 병원을 가. 요즘 정말 많은 사람이 겪고 있는 문제 같아.”


사실 나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의 그날 밤은 배탈도 급체도 아니었다. 마침 옆에 앉아 있던 분이 신신의 절친이 운영 중인 정신건강의학과가 아주 좋다며 이름을 적어 주셨다.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치킨값 안 내도 돼.


고마운 사람들. 이제 진짜 미루면 안 되겠다.



“안녕하세요. 첫 내원이고요. 토요일 오전으로 예약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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