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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은늘 Mar 17. 2019

"우울감이 평균 이상이라 약물 치료가 필요합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어 #7

2주는 바쁘면서도 더디게 흘러갔다. 종종 퇴근길 지하철에서 숨이 가빠졌다. 그럴 때면 10여 년을 매일같이 탄 지하철이 생경했다. 짜증이일상이었지만 한 번도 이 공간에 있는 것이 버겁거나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치밀어 오르는 이 느낌은 분노인지 불안인지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공황 발작이 오면 바로 먹으라며 의사 선생님이 처방해주신 약은 한 번도 먹지 않았다. 언제 먹어야 할지 여전히 가늠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적어도 남에게 고통을 숨길 수 있으면 아직 괜찮은 거 아닐까? 겉보기에 내 모습은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여느 직장인과 같았다. 나는 늘 표정 없는 얼굴로 양을 세며 내릴 역도착하기만을 기다렸다.


일상 속 작은 위기를 두어 번 지나자 영영 올 것 같지 않던 병원 예약 날이 되었다. 기대에 찬 내 앞에 여러 가지 결과지를 내민 의사 선생님은 가장 먼저 심장 검사 결과를 말씀해주셨다. 우려와 달리 심장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었지만 스트레스 저항도가 98%로 굉장히 높았다.


“스트레스 저항도는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고 저항하는 힘을 말하는 거예요. 보통 50~60% 정도인데 98%라는 수치의 장점은 내가 그 정도의 의지와 힘이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해야 할 스트레스가 너무도 많은 것이라는 거죠.”


노년에 접어들수록 스트레스 저항도가 낮아져서 공황 증세가 오기 쉽다고 했다. 반면 나는 스트레스 저항도가 심히 높아 예상과 달리 공황 증세는 10% 정도로 낮았다. 의사 선생님은 웃으며 좋은 징조라고 말씀하셨다. 약은 조금만 먹어도 되겠어요.


여기 보면 K가 굉장히 높죠?
이건 신체화라고 하는 건데
스트레스 받거나 힘들어도
참고 억누르다가
신체로 증상이 나오는 거예요.
애나 님은 정말 많이 참는 사람이네요.


돌이켜 보면 어릴 적부터 나는 항상 뇌와 몸이 따로 노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의 뇌는 몹시 쿨하여 시험 기간이 되어도 의연했는데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학업 스트레스라는 진단을 받곤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어이없어하며 ‘이 아이는 공부는 안 하고 잠만 잘 잡니다’라고 항변했지만 어쨌든 나는 자주 아팠다.


“애정 욕구, 사랑받고 싶고, 관심받고 싶은 욕구도 큰 성향의 사람인데 아마 그것도 표현하지 못하고 참는 사람일 거예요.”


검사지를 보면 이런 것까지 다 나온답니다. 의사 선생님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우울감은 상, 중, 하 중에 중보다 높아요.
치료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예민도도 높아져 있어서
외부 자극에 굉장히 약해져 있어요.
불안감도 있고요.


네? 제가 치료가 필요할 정도라고요? 엄마가 옆에 있었다면 또 어이없다고 웃었을 것이다.


“선생님, 저는 우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 좀 쉽게 행복해져서 퇴근하고 침대 위에 누워 있기만 해도 행복해하거든요.”


“그러게요. 본인이 직접 작성한 문답지에는 우울감이 전혀 없고 문제가 하나도 없는 점수가 나왔어요. 이 정도면 뭐 신나서 날아다녀야 하는 사람 수준인데.”


급속도로 혼돈에 빠지는 내 상태를 눈치챘는지 의사 선생님은 재빨리 말씀하셨다.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건 좋은 거예요. 계속 지금처럼 잘 하시면 돼요. 덕분에 공황 증세도 약한 것 같네요.”


의사 선생님은 왜 스트레스 저항도 끝판왕인 내 신체에 공황 발작이 시작되었는지는 굳이 묻지 않으셨다.


“본인 의지도 있고 지금은 많이 괜찮아지셨다고 하니까 약은 최소한으로 먹어도 될 것 같아요.”


그치만 그래도요.


“선생님 약만 먹으면 제 마음의 상처나 트라우마가 사라지나요?”


정말 저한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으셔도 되나요?


기억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거예요.
하지만 더는 그 기억이
내 몸과 마음을 괴롭히지 못하게
약이 도와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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