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라고 있어요
이쯤되니 남편이 솔찬히 원망스럽다.
내 한몸 가누기도 힘들고 호르몬도 날뛰는 임신 중후반의 임산부로서 회사에서 격무에 시달리고 집에 돌아와서 ‘그냥’ 애보기도 벅찬데 굳이 이런 시기에 고난도 밥상머리 교육을 시작해서는 나를 이 고생을 시키나.
그렇다고 본인이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진두 지휘해 나가는 것도 아니어서 결국 (답답하고 신경쓰이는) 내가나서서 이리저리 애쓰게 만들지를 않나 말이다(남편의 생각은 다를 수 있음 주의). 남편을 향해 가재미 눈을 한번 흘겨주고 또 아이가 오전엔 얼마나 먹었는지 체크를 해간다.
밥상머리 교육 이후로 아이 혼자 식사를 하게 할 수 없어서 오전엔 대체로 남편이 아이와 아침식사를 하고(나는 출근길이 멀어 먹을수가 없다), 저녁엔 특별한 일이 없으면 온 가족이 둘러앉아 식사를 하게 되었다. 예전엔 우리가 퇴근하면 아이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였는데 밥상머리 교육을 하며 달라진 집 풍경이다. 덕분에 회사에서의 야근도 상당히 제한적이다.
아이는 여전히 아침이 가장 부진하다. 아침에는 방바닥에 드러누워서 식탁 위로 올라오려고 하지 않아서 거기서부터 실갱이가 시작된다. 그냥 “올라와서 밥먹어.” 라고 말해준 다음 안먹으면 치우면 되는거지만 우리 양육자들은 도통 밥을 바로 치우지는 못했다. 적어도 세번은 올라와서 밥먹으라고 말하게 된다.
저녁은 온가족이 둘러앉아 자신의 밥을 열심히 먹어서 그런지 아이도 아침보다는 식탁에 잘 앉고 자기 밥도 스스로 꽤 먹는다. 그렇지만 여전히 밥이 좋아서 식사에 집중한다기보다 다 먹어야한다는 의무감이 강한 것 같다.
밥먹으면서 놀아주면 안되는거지만 그것도 쉽지않다. 결국 아이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 오늘 올라온 반찬과
관련된 재밌는 이야기도 얹어보고, 내 호불호도 밝혀본다. 그것도 약발이 떨어지면 “밥을 먹으면 힘이 세져.” 라고 하며 “힘이 세져서 아빠 늑대를 잡아먹자!” 하고 밥을 먹도록 유도한다. 아이는 밥먹는걸 놀이로 인식하고 신나게 밥을 퍼먹었다. 이날이 처음으로 아이가 밥을 더 달라고 한 날이다.
알고있다. 이 밥상머리 교육은 식사를 놀이로 인식하도록 하는 것이 아닌 것을. 그렇지만 나도 매 끼니가 맛있진 않고 아이에게 늘 원하는 반찬을 주는 것도 아닌데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스스로 먹는다면 거기에 즐거운 상상 몇가지 얹어줘도 되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밥 먹어 밥” 하면서 온 식구가 아이 밥먹는 모습에 짜증 내는것 보다는 낫지 않나 생각했다.
예전에는 밥먹다가 숟가락이나 젓가락 떨어뜨리면 득달같이 주워 주었는데 그러면 숟가락 떨어뜨리는것 자체를 장난(혹은 놀이)으로 생각한다고 해서 주워주지 않고 그냥 남은 식기로 먹게 했다. 생각보다 효과가 있어서 숟가락 떨어뜨리는 장난은 거의 치지 않게 되었다.
어떤 날은 밥을 물에 말아먹고, 어떤 날은 물에 찍어먹고, 어떤 날은 밥을 알알이 젓가락으로 먹고 난리부르스지만 일단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먹긴 먹는다. 양육자들이 끄트머리쯤에 숟가락에 밥만 퍼주는 정도로 2-3회 정도 도와주고 있다. 밥을 소분하여 냉동해두고 데워주는데 간혹 너무 붙어있어 퍼기 힘든 경우가 있기도 하고 양육자들의 인내심이 거기까지이기도 하다.
젓가락질은 원래 잘했지만 숟가락질은 살짝 서툰감이 있었는데 그것도 많이 늘었다.
아이의 몸무게는 여전히 제자리. 아이 발달 사이트에 넣어보면 쇠약증이라고 나온다. 와중에 냉방병인지 감기인지 기침+콧물이 시작되어 병원에 가서 키와 몸무게를 체크했는데 키는 102cm였다. 키는 75%이니 성장 자체는 문제가 크지 않은 것 같아 양육자 모두가 한숨 돌렸다.
양육자들의 타들어가는 속과 별개로 어쨌거나 아이는 자기의 속도대로 자라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