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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Mar 04. 2021

[오늘을 남기다] 척, 척, 척

여유로웠던 시간에. 2021. 3. 4.

 아이들이 개학을 했다. 물론 상황은 작년과 비슷하다.

첫째는 일주일에 2번 학교에 가고, 둘째는 그래도 3번은 간다. 둘은 겹치는 날이 하루도 없이 번갈아 집을 지킨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오늘은 둘째가 학교에 가는 날이라 첫째와 단둘이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첫째 아이와 단둘이 있는 날은 좀 여유롭다. 이제 5학년이니 제법 스스로 할 줄 아는 일도 많아졌다. 아들은 오전 내내 온라인 수업하느라 바쁘다.


나는 온기를 오래 품을 수 있는 묵직한 컵에 커피를 담았다. 창가 앞에 두 다리 쭉 뻗고 앉아, 제멋대로 엎어져있는 책을 집어 들었다.

며칠 전에 첫째 아이가 산 ‘보노보노’ 만화책이었다. 어릴 적 그림이 귀여워 좋아했던 만화인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이 안 났다.

제목 하나에 8컷으로 된 만화가 계속 이어지는데 박장대소를 할 만큼의 재미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무슨 만화가 이래?’ 하면서 보는데, 담백한 그림과 툭툭 내뱉는 말투,  분명 숨겨진 뜻이 있을 법한 대화에 빠져들었다.


그중 한 에피소드이다.

보노보노가 높은 곳에서 다이빙하는 아빠를 보며

“높은 곳에서도 태연하게 뛰어내릴 수 있다니, 아빠는 대단하다” 하며 감탄을 한다.

그런데 바다와 점점 가까워지는 아빠는 바둥바둥거리며 몸부림을 치다 풍덩 빠진다.

보노보노에게는 아빠가 용감하고 대단해 보였지만, 아빠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독백으로 쓰인 달랑 저 한 문장과 8컷의 보노보노 아빠의 다이빙 장면이 그냥 지나쳐지지 않았다.

높은 절벽에 아무렇지 않은 척 서있다가 멋지게 다이빙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무서우면 무섭다고 티 좀 내던지, 절벽을 타고 조심조심 내려가던가 하지, 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거야.

나처럼.


오후에 큰 시누와 통화를 했다. 큰 시누는 내 소식을 아는 몇 안 되는 가족 중에 한 분이다. 감사하게 안부전화를 가끔 해주신다. 나는 밝은 목소리로 감사함을 표현하며, 괜찮다는 말을 몇 차례 하다가 끊었다. 형님도 씩씩해서 좋다고 잘 챙겨 지내라며 인사를 하고 끊었다.

끊고 나서 형님이 “씩씩하다”라고 한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풋, 나도 안 씩씩한데, 그냥 그런 척하는 건데.

보노보노 아빠처럼.


2021. 3.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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