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스타트업을 선택한 이유는 앞서 밝혔다. IT 스타트업인 A는 유연한 출퇴근 시간을 포함한 자유로운 조직 문화 때문에 선택했다. 핀테크 스타트업인 B는 새로운 커리어의 기회와 경제적 보상 가능성 때문에 택했다. 일확천금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B 입사를 계기로 5년 후쯤에는 주택담보대출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었더랬다.
6년의 스타트업 경험 끝에 실업자의 신분으로 스타트업 선택 전 알아두어야 할 점에 대해 말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대기업 직원이 조명 센서가 있는 계단을 밟고 차근차근 다음 층을 향해 올라간다면 스타트업 직원은 제자리 점프로 담장을 넘어야 한다. 도움닫기 발판은 없다. 어둠 속 희끄무레한 담장은 높이가 가늠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겐 스타트업을 추천하고 싶은 이유가 몇 가지 있다.
(1) 고속 성장
커리어의 확장
스타트업에서는 누구나 기존 직무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겪게 된다. 재무 업무를 기준으로 설명하면 대기업에서는 재무부서가 회계팀, 세무팀, 자금팀 등으로 나누어져 있다. 회계팀 내에서도 매출, 매입, 결산 등 파트가 분류되어 한 사람이 담당하는 업무가 세부적이고 깊다. 매우 큰 규모의 기업에서는 1년 내내 법인카드 비용 정산만 하거나 거래처 코드 등록만 담당하는 직원도 있다. 스타트업에서는 회계, 세무, 자금, 경영계획, 투자사 보고 등의 재무 업무를 한 팀 혹은 한 사람이 담당한다. 재무뿐 아니라 인사, 총무, 정부 지원 사업까지 한 사람이 담당하는 경우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이 많았고 매뉴얼은 전무했지만 정해진 시간 안에 빠짐없이 해야 했다. 역할이 늘어난 탓에 의지와 무관하게 업무 스펙트럼이 초스피드로 넓어졌다.
의사결정자는 바로 나
내 의견과 아이디어가 바로 실행된다. 사원인 경우, 대기업에서는 파트장-팀장-임원 층층 시야의 보고라인을 거쳐야 하는 일을 대표와 독대해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명의 승인을 기다릴 필요 없이 대표의 결정만 통과하면 빠르게 실행할 수 있다. 다만 그 실행에 대해 온전히 책임을 져야 하고 성공과 실패를 압축적으로 경험하며 깨달음과 감각을 얻는다.
숏컷 리더십
금방 리더가 된다. 사원부터 책임을 지는 일을 연습하며 대기업에서는 10년이 걸릴 팀장이나 임원의 역할을 빠르면 3~5년이 지나면 맡게 될 수 있다. 직급 없이 담당자로 입사하더라도 성과를 내고 자격을 갖춘다면 몇 년 안에 C-레벨이 되는 경우가 스타트업에서는 종종 있는 일이다. 규모가 아무리 작아도 리더는 결국 리더가 된다.
이렇듯 스타트업에서는 내 결정 아래에 보다 많은 일을 하고 리더가 되는 고속 성장을 경험을 할 수 있다. 속도감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스타트업을 추천한다.
(2) 자율성과 유연성을 갖춘 조직문화
근무 방식의 자유로움
스타트업의 자율성은 근무 방식에서 가장 드러나 있다. 9 to 6 대신 각자 출퇴근 시간을 정해 근무하는 유연근무제가 있는가 하면 오피스와 재택근무를 혼합한 하이브리드형 근무 형태도 있다. 내가 여기에 홀랑 넘어가 입사했었고 여전히 선호하는 근무 방식이다. 풀재택 기업은 오피스를 자율 좌석제로 운영하고 오프라인 업무가 필요할 경우에만 오피스를 이용하기도 한다. 일 8시간 또는 주 40시간만 지키면 언제 어디서든 업무를 하면 된다는 기업이 있는 반면 업무시간과 무관하게 성과만 내면 된다는 곳도 있다. 자율과 생산성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있고 재택근무를 폐지하는 기업이 슬슬 늘어나는 추세이지만 근무 방식의 자유로움이야말로 스타트업을 대변하는 이미지가 아닐까 싶다.
호칭과 커뮤니케이션
과장님, 팀장님 직급 대신 상대의 이름으로 OO님이라고 부르는 방식이 가장 흔하다. A 입사 초반엔 익숙지 않아 나도 모르게 대표님, 실장님이라고 불렀지만 점차 동료들이 날 팀장님보다 OO님이라 부르는 게 더 자연스럽고 편해졌다. 한글 이름 대신 영어 닉네임을 사용하는 회사도 있다. 회사를 개인의 일상과 떨어뜨릴 부캐가 필요한 걸까. 장차 글로벌이 타깃인 기업에겐 영어 닉네임이 커뮤니케이션에 유리할 테고 영어 닉네임 특유의 귀여움으로 나이나 험악한 외모의 장벽을 낮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 김 팀장님, 박 이사님 부르는 것보다 샐리, 스티브라고 부르면 하고 싶은 말을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지 않을까. B회사에서는 직급 호칭을 사용하다가 OO님으로 호칭 변경을 했다. 이전에도 대표님을 어려워하는 직원은 별로 없었지만 OO님으로 부르게 되니 직원들은 더 적극적으로 거침없이 대표님에게 의견 개진을 하게 됐다.
오피스 캐주얼이 아니라 그냥 캐주얼
오래된 일이다. 한때 오피스 캐주얼 붐이었다. 카라가 있는 티셔츠에 단정한 면바지, 운동화와 로퍼가 가능하다는 공지가 그룹웨어에 게재됐다. 혁명이었다. 하계 반팔 셔츠와 노타이 공지가 있기 전까지 긴 셔츠와 재킷을 입고 삐질삐질 땀을 흘리던 시절에 비하면 오피스 캐주얼도 감지덕지였지만 지금 스타트업의 복장은 오피스 캐주얼이 아니라 그냥 네 마음대로다. 일 잘하고 성과를 내면 그만. 외부 미팅이 없는 직군은 더욱 자유롭다. 동료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는 범위라면 모자도 피어싱도 타투도 오케이다. 자유로운 복장 덕분에 출근 시간이 대폭 감축됐고 일상복과 근무복의 경계를 만들지 않아도 되었으며 무더위와 추위로부터 더 열심히 나를 보호할 수 있었다.
(3) High-return 스톡옵션
스타트업 이직을 하고 은행에 가면 이전 직장에서 연봉 외에도 받았던 혜택이 다채로웠음을 실감한다. 마이너스 대출 연장을 하며 처음 알았다. 그리 규모가 대단치 않다고 느꼈던 전 직장에도 직원을 위한 기업 우대금리가 있었음을. 법인 콘도 금액과 숙박 사이트 금액의 차이가 적지 않다는 것을. 그래도 잘한 선택이라고 정신무장했다. 비록 단 한 푼의 연봉인상 없이 각종 복리후생을 포기하며 입사했지만 몇 년 후 회사가 좋은 가격에 인수합병 된다면 혹은 기업공개까지 간다면 그야말로 돈방석에 앉을 수도 있다. 내 기여도가 최후에 어떻게 평가받을지 상상하며 달달한 미래를 꿈꿨다.
스톡옵션 부자들을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본다. 고급 외제차부터 강남 아파트 가격까지 스톡옵션을 통해 부자가 된 평범한 사람들은 로또에 맞은 게 아니다. 자기의 결정 하에 자기의 노력으로 부자가 된 것이다. 스타트업을 통해 경제적 자유를 실현하는 건 낮은 확률이지만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4) 가치와 비전의 공유
1월 2일 시무식, 강당에 모여 혹은 자리에 앉아 모니터를 통해 대표이사의 신년사 발표를 듣고 올해의 비전을 공유받는다. 듣는 동안 잠시 후 게재할 연말 결산 공지에 대해 생각한다. 회사의 비전은 매우 중요한 바이지만 내겐 오늘의 할 일이 있다. 기억력이 나쁜 탓일까. 이전 직장에서는 늘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매년 올해 경기가 어렵고 내년은 더 어려울 테니 정신 차리고 열심히 일하라는 맥락의 얘길 들어온 것 같긴 하다.
스타트업 A와 B 모두 면접에서 대표의 입을 통해 직접 향후 3~5개년 비전을 들었다. 이해하고 공감했기 때문에 입사를 결정했고 입사 후에도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기회가 때때로 있었다. 기업의 가치와 비전에 대한 시의 적절하고 솔직한 공유는 능동적이고 자율적인 직원에게 일에 매진할 원동력이 된다.
위와 같은 이유로 혹은 또 다른 이유로 스타트업 입사를 고민 중이라면 입사 후 3~5년 안에 무조건 회사가 망한다고 가정해 보길 바란다. 앞으로 망할 회사에 입사하는 시한부 정규직이 되는 셈이다. 물론 그간의 야근과 회사를 향한 지나친 몰입, 더딘 연봉인상을 견디며 고대한 스톡옵션도 한 번에 날아간다고 보면 된다. 앞서 추천 이유를 늘어놓고 이런 얘기를 하는 게 황당하겠지만 선택 전 꼭 필요한 가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꼭, 반드시 선택하고 싶은 이유가 있다면 그 선택에 적극 찬성한다.
선택의 이유가 확실하다면 고민은 짧게 한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직장 인생이 끝나는 건 아니다. 쉬우리란 보장은 없지만 이직이라는 기회가 여전히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