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자금력과 런웨이의 길이
곳간이 충분한가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말이 있다. 대감집 곳간은 노비들이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여긴 다르다. 면접 때만 해도 그를 유혹하던 달콤한 복지들이 입사와 동시에 하나 둘 없어지더니 3개월 만에 벙찐 얼굴로 구조조정 면담 테이블에 앉게 된 직원을 마주한 적이 있다. 억울하겠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사정은 이러했다. 투자가 예정되어 있었다. 투자 시장이 나빠진다 소문이 돌더니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확실하다던 투자가 무산됐다. 곳간이 바닥났다. 비용을 줄여야 했다. 대기업에선 대개 저항이 적은 복지부터 시차를 두고 서서히 줄여 나간다. 복지포인트 지급을 중단하고 건강검진 주기를 1년에서 2년으로 변경한다. 연말 인센티브와 승진을 보류한다. 이런 시그널을 잘 읽으면 무급휴가와 급여삭감, 구조조정 같은 최악의 단계 전에 이직이든 뭐든 다음을 준비할 시간이 약간은 주어진다. 스타트업은 이 기간을 과감하게 축약한다. 대감집은 파는 데 오래 걸리지만 사글셋방은 당장 뺄 수 있다. 해서 입사 3개월 만에 예상치 못한 퇴사 결말을 맞기도 한다.
DART 말고 여기에서
회사의 재무현황을 통해 운영자금이 충분한지 확인해야 한다. 지금까지 입사 전에 기업의 재무현황을 DART(전자공시시스템)에서 찾았다면 이번엔 어려울 거라 예상한다. 공시 대상 법인은 1) 상장법인, 비상장법인 중 2) 공모법인, 3) 주주 500인 이상 외감법인으로 23년 자본시장연구원이 발표한 데이터를 근거로 상장 법인은 전체 주식회사 중 약 0.6%로 추정된다. (현재 25년이지만 그 사이 큰 변화가 없을 거라 생각하자) 이 추정치에 비상장법인 중 공시 대상 법인을 더해야 하지만 이쯤 해두기로 한다. 내가 말하고자 한 건 DART를 통해 재무상황을 확인할 수 있는 기업 수가 상당히 적다는 것이다.
이럴 땐 스타트업 정보 제공 플랫폼 혁신의 숲(https://www.innoforest.co.kr)과 THE VC(https://thevc.kr)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두 플랫폼의 주요 정보 제공 대상은 스타트업, 투자자, 금융기관이지만 우리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있다. 어떻게든 로그인을 해서(아이디를 빌려서라도) 확인해 보길 바란다. 거래액, 트래픽, 고용현황, 투자라운드, 매출 등 기대보다 많은 데이터를 제공한다. 여기서도 정보를 얻지 못한다면 회사에 직접 묻는다. 물어봐야 할 것은 매출, 고정비, 런웨이, 투자계획을 포함한 현금흐름이다. 런웨이(runway)는 현재 보유 자금으로 추가 투자나 매출 유입 없이 버틸 수 있는 기간을 말한다. 즉, 앞으로 얼마나 생존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로 런웨이가 길수록 구직자에게 유리하다.
(4) 투자 단계와 최종 목표
시리즈 A, B, C?
특정 스타트업을 검색하면 종종 투자 관련 기사를 볼 수 있다. 투자유치가 완료되면 피투자 기업 혹은 투자사에서 홍보기사로 내는 경우가 많은데 시리즈 단계와 투자규모, 참여한 투자사까지 상세히 밝히기도 한다. 투자규모와 시기를 보면 이 회사 곳간이 얼마나 차 있나 알 수 있다. 투자단계는 시드(seed)-프리 시리즈(Pre-A)-시리즈 A, B, C(어쩔 땐 D, E, F 단계까지)-Pre-IPO-IPO(기업공개)의 순서로 이루어진다.
시드는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제품과 서비스 초기 버전을 만드는 단계로 엔젤투자자, 엑셀러레이터 등이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을 투자한다. 프리는 제품과 서비스 시장 테스트 후 본격적인 성장을 위한 투자 단계이며 규모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이다. 시리즈 A는 시장 확장을 위해 공격적인 마케팅, 적극적인 인재 채용이 이루어지는 단계이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투자금액이 커지고 누적 투자자가 많아진다. 시리즈가 높아질수록 다수의 투자자가 요모조모 살펴 뜯어보고 투자한 기업이니 믿을만하다 싶지만 D나 E단계에서 파산한 기업도 없지 않다. 어떤 EXIT 계획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아두면 좋다. IPO나 M&A가 된다면 직원인 나에게도 당연히 적지 않은 영향이 있을 테니 합류할 회사가 어느 단계에 와있는지는 필히 확인해야 한다.
(5) 기대 역할과 조직문화
나는 누구, 여긴 어디
채용 공고을 읽어 보면 내가 하게 될 일을 미리 파악할 수 있다. B에서 내 직무는 회계마감, 세무신고, 외부감사, 투자사 대응으로 안내받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재무 업무와 다르지 않다. 더해진 업무가 있다면 비즈니스 운영팀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서포트하는 일이었다. 운영팀 업무를 직접 경험해 봄으로써 비즈니스를 빠르게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설명을 들었고 적극 원하던 바였다. 외부 미팅에 참석하고 운영팀 손이 딸릴 땐 CS 답변을 했다. 여기까지는 예측된 일이었다. 그런데 곧 또 다른 업무가 생겼다. 인사 담당자가 부재했는데 인원이 늘어갈수록 직원들의 바람이 다양해져 복리후생 업무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경영지원 성격의 업무였으므로 자연스럽게 그중 가장 연관성이 높은 내가 가져갔다. 영역은 점점 넓어져 급여, 채용, 퇴직, 교육 등 인사 업무 전반과 오피스 임대인과의 소통, 비품 관리, 주주총회, 이사회 절차까지 내 몫이 됐다. 업무가 늘어나며 추가 채용이 있었지만 직원 규모를 줄이는 과정에서 모두 내 차지가 되고 말았다.
단발성 업무는 TF를 결성하기도 한다. 정부지원사업을 위해 각 팀에서 급하게 모여 TF를 만들고 프로젝트를 수행하는가 하면, 워크숍이나 송년회 TF는 그때그때 랜덤으로 꾸려진다. 소수의 인원이 가로와 세로로 엮여 다양한 팀을 이루고 역할을 수행한다.
기대 역할에 대해 생각할 땐 조직의 구성을 먼저 파악해야 한다. 촘촘하게 구성된 대기업과 다르게 스타트업의 조직 구성은 느슨하고 가끔 구멍이 있다. 아직 담당자가 없지만 누군가는 해야 할 업무와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업무에 대해서 그려봐야 한다. 일이 늘어나면 당연히 채용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반문할 수 있겠지만 당장 돈이 궁한 스타트업에서 일인 다역을 하는 사례가 숱하다. 때문에 바쁘고 할 일이 많다.
오피스를 지배하는 공기
스타트업의 조직문화는 단순한 분위기가 아니다. 작은 조직일수록 한 사람의 영향력이 막대하다. 큰 조직에서 개인의 영향력이 1/1,000 혹은 1/10,000이라면 스타트업에서는 1/10의 영향력을 갖게 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동료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진다. 기왕이면 동료들과 같은 방향을 보고 나와 맞는 문화에서 일해야 한다. 맞지 않은 조직에선 문화가 강요가 되고 괴로워진다. 높은 연봉과 화려한 복지도 버팀목이 돼주지 못한다.
B 면접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대표가 소개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이었다. 크던 작던 각자의 일을 공유하고 함께 고민하는 문화가 내가 바라던 문화였다. 팀 간 벽을 치고 보이지 않는 신경전 속에 알음알음 알게 되는 소문이 싫었다. 벽은 조직이 커지면 어쩔 수 없이 자라난다. B에선 오픈 캘린더를 통해 개인 일정을 전체 공유한다고 했다. 필요하다면 캘린더를 보고 일정이 빈 시간에 자유롭게 미팅 신청을 한다. 신청 시 아젠다와 미리 알아두면 도움 될 정보를 첨부한다. 스스럼없이 각자 일정을 공유하고 번거로운 사전 조율 없이 미팅을 요청하는 방식이 맘에 들었다. 조직문화가 투명하고 합리적일 거라 추측했다.
조직문화는 면접 과정과 오피스의 공기로도 유추할 수 있다. HR 담당자의 연락 메일 톤과 속도에서 친절함과 간결함을 확인할 수 있고 면접장으로 안내받으며 구직자에 대한 배려와 솔직함을 알 수 있다. 면접 중엔 잠시 관찰자가 되어 대표와 직원들 간의 케미스트리를 파악하자. 지나다니는 직원들의 얼굴 생기와 표정을 살펴보자. 자세히 보면 어느 정도 그곳의 조직문화가 감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