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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단단 Jul 18. 2024

가장 아름다운 퇴사법

하루를 마무리할 때, 한달을 회고할 때, 연말에 개인 워크샵을 떠나 생각을 정리할 때 가장 마지막에 꼭 하는 작업이 있다. 이 작업을 해야 지난 시간과 경험이 무의미하게 흘러가버리거나 자극적이고 부정적인 기억으로 왜곡되지 않는다. 바로 감사함을 적는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회사 생활을 아름답게 회고하고 싶었다. 이 회사에서 배우고 얻은 것, 회사 동료들에 대한 감사를 기록해보기로 했다.




마지막 회사에서 배운 것


마지막 회사인 카카오스타일을 다니면서 배우고 얻은 것은 3가지인데, [회사 외부 활동], [데이터], [나답게 일하는 법]이었다.


이직하자마자 퍼블리, 헤이조이스, 코스모폴리탄 등으로부터 강의와 콘텐츠 협업 문의를 받았다. 카카오 타이틀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롯데와 SK에 다닐 때는 브런치에 올린 내 콘텐츠만으로 승부를 봐야 해서 나에 대한 소개나 설명이 더 많이 필요했다. 카카오스타일에 이직한 후에는 타이틀 덕분에 기회가 더 많아졌다.


두 번째는 데이터다. 카카오스타일로 이직하기 직전 SK스토아에 다니던 2021년 말이었다. SQL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 마케팅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를 데이터팀에 요청해서 받지 않고 담당자가 직접 SQL로 추출해서 분석할 수 있는데 앞으로는 이 방향으로 패러다임이 바뀔거라 SQL을 배워야 한다고들 말했다. 그때 "어? 나 이거 배워야겠다는데?" 생각이 들어서 5주 짜리 강의를 들었다. 그때 회사는 아직 SQL을 현업에서 활발하게 쓰지 않았고 강의만 들은 상태로 이직을 했다.


카카오스타일은 리대시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담당자들이 직접 SQL로 데이터를 추출하고 분석하는 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 SQL을 잘 다루는 동료가 사내 강의도 해주었고, 퇴근하고 낑낑대며 고장난 쿼리를 고치면서 SQL 실력을 쌓았다. 조금 더 욕심을 내서 SQLD 자격증도 따고, 데이터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마인드셋을 기를 수 있었다. 작년부터는 챗GPT를 활용해서 복잡한 쿼리, 새로운 문법도 어렵지 않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크게 얻은 것은 [나답게 일하는 법]이었다. 그전까지는 주니어 연차이기도 했고, 대기업에서만 일을 해왔어서 회사에 나를 끼워맞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네 번째 회사인 카카오스타일에 왔을 때는 마음가짐이 달랐다. 회사 생활 10년차였고, 여러 번의 이직을 통해 회사가 나의 커리어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회사보다 큰 나의 커리어 패스 안에 회사를 넣어둔다는 감각이 있었다. 나에게 회사란 레고를 완성하는데 필요한 모듈 블럭 같은 개념이었다.


여전히 회사의 비전과 상사의 리더십이 중요하기는 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나답게 일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답게 일할 수 있도록 상사와 회사라는 환경을 세팅하기로 했다. 내 모난 부분을 깎아서 억지로 회사에 끼워맞추면 장점도 단점도 두루뭉슬한 애매한 사람이 되어버린다. 못난 모습도 괜찮아질만큼 내 강점과 매력을 끌어올리기로 했다. 내 단점은 단체 활동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고 장점은 업무를 구조화, 시스템화하는 역량이 있다는 것이었다. 몰입할 수 있는 업무 환경에서 여기저기 흩어진 업무를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하는 것에 자신이 있었다.


"퇴근하고 같이 맥주마시러 가지는 않지만, 같이 일하면 늘 마음이 놓이고 명쾌한 사람."

"단체 활동에서는 조용하지만 1:1로 만나면 다정하게 마음을 열어 고민을 들어주고 도와주는 사람."


이게 내가 강화한 나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내가 만든 나다운 모습으로 점점 사람들이 나를 봐주기 시작했다. 템플릿이 필요할 때, 업무 정리가 필요할 때, 새로운 업무 시스템을 만들어야 할 때, 망가진 프로젝트를 되살려야 할 때 사람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다. 내 방식으로도 얼마든지 성과를 내고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인받고 나자 신기하게도 이전에는 싫던 것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퇴근 후 동료들과 맥주를 마시는 것이 즐거워졌고, 동료들과 유닛을 이뤄서 같이 일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억지로 내가 아닌 모습을 만들려고 애쓸 때에는 가벼운 식사도 부담스러웠지만 그냥 내 모습을 보여주면 힘을 빼고 편하게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성과는 내 강점을 갈고 닦는 과정에서 [기록과 체계화]라는 대체 불가능한 나만의 키워드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계획과 템플릿, 시스템에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일까봐 펼쳐보지 않았던 내 강점을 마음껏 펼치면서 그 길로 더 깊이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퇴사 소식을 알리며 회사 밖에서 "기록으로 일상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을 돕는 일을 하겠다"고 했을 때 모두가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너무 잘 어울리는 일이라고, 잘할 것 같다고, 회사 밖에서 오히려 더 성공할 것 같다고 응원해주었다.


카카오스타일 이직을 고민할 때 너무 답이 안 나와서 사주를 보러간 적이 있었다. 그때 사주풀이 전문가가 나에게 이직하지 말라고 권했었다. 그냥 지금 다니는 안정적인 대기업에서 나의 때를 기다리라는 것이다. 그 말을 듣자마자 "싫은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민없이 이직을 결정했다. 그 결정을 두고두고 잘했다고 생각한다.




동료들에게 전하는 감사 인사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를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정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며 감사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회의가 끝나고 허공을 향해 "감사합니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수련실을 나서며 "감사합니다", 리더가 법인카드로 사주는 커피를 받아들며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별로 감사하지 않지만 그냥 습관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물론 이마저도 안하는 사람보다 훨씬 훌륭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짜 감사는 구체적인 감탄이다.


"오늘 회의가 길어질 줄 알았는데 미리 자료 정리를 깔끔하게 해주셔서 정말 수월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주에 뵐게요."

"회사에서 구부정한 자세로 일하느라 온몸이 뻐근했는데 요가 한 시간 하니까 정말 개운해요. 감사합니다."

"출근길이 너무 더워서 아이스 커피 마시고 싶었는데 너무 시원해요. 감사합니다."


또 한번 고백하자면,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도 구체적인 감탄을 동반한 감사 인사를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꼭 감탄을 담은 감사 인사로 회사 생활을 마무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12년 동안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이미 3번의 퇴사를 경험했지만 이번 퇴사는 경우가 다르다. 넥스트 스텝이 다른 회사가 아닌 [내 일을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방황 끝에 다시 회사로 돌아오게 될 수도 있지만 회사 밖에서 나만의 일을 찾겠다는 단단한 결심을 하고 회사 밖으로 나서는 것인만큼 내 인생에 회사는 이곳이 마지막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인만큼 잘 마무리하고 싶었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 후회하지 않도록 제대로 끝맺고 싶었다.


내가 가진 모든 감탄력을 동원해 회사 생활을 하면서 감사했던 일, 감사한 동료들을 떠올려 돌아보고 구체적으로 감사를 전하기로 했다. 인수인계가 끝나고 남은 나의 마지막 업무는 편지쓰기였다.


누구에게 편지를 쓸지 생각하다보니 회사 생활을 하며 누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었는지, 누구와 회사 밖에서도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은지 알 수 있었다. 마치 결혼할 때 누구에게 청첩장을 줘야 할지 결정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커뮤니케이션을 많이하고 미팅을 자주 했지만 편지까지는 쓰고 싶지 않은 동료가 있었고, 같이 업무를 하거나 자주 마주친 적은 없지만 꼭 편지를 전하고 싶은 동료가 있었다.


손글씨를 예쁘게 못쓰고 손목이 아파 손편지 쓰는 것을 즐기지 않지만 제대로 감사함을 전하기에는 손편지만한 게 없다. 한 명에 20분씩 총 15명의 동료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에는 함께 일을 하면서 동료의 어떤 장점 덕분에 도움을 받았는지 어떤 모습을 보며 감탄했는지 구체적으로 적었다.


마지막 일주일 동안은 티타임도 매 시간마다 가졌다. 입버릇처럼 "제가 내향인이라서..."라고 말하고 다니던 내가 빼곡하게 티타임을 잡는 것을 본 주변 동료들은 조용히 마무리할 줄 알았던 내가 여기저기 마지막 인사를 하고 다니는 모습에 놀란 것 같았다.


이 회사를 2년 4개월 동안 다니면서 했던 티타임보다 더 많은 티타임을 마지막 일주일에 했다. 만나는 동료마다 내가 왜 회사를 떠나기로 결심했는지, 앞으로 계획은 무엇인지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야 했지만 지루하거나 힘들지 않았다. 온전히 나를 위한 감사인사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제대로 감사를 전하고 마무리해야 새로운 시작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몰랐던 동료들의 생각이나 고민도 들을 수 있었다. 떠나는 사람 앞이니까 할 수 있는 속 깊은 이야기들을 들으며 왜 이제야 이런 시간을 가졌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마지막 티타임을 갖고 나서 오히려 더 끈끈하게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드디어 마지막 출근날. 아쉬움 없이 한분 한분에게 모두 인사를 건넸고, 그 때마다 진심이 가득 담긴 응원과 축하를 받았다. 하루 종일 인사를 하고 노트북과 장비를 반납하고 이른 오후 3시에 회사 밖을 나섰다. 2주후에 팀원들과 저녁을 먹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아쉽고 허전한지.


이 순간을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했는데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앞에는 어떤 삶이 펼쳐질까. 나는 어떤 문을 열게 될까.


회사 앞 스타벅스에 앉아 심호흡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후회 없이 미련 없이 아쉬움 없이 감탄을 가득 담은 감사와 함께 나의 회사 생활을 떠내보냈다.


이제 갈 수 있을 것 같다.

새로운 나의 길을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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