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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30. 2022

#1. 장마와 진토닉

나도 집을 사고 싶어


그해 여름


2019년 여름. 도저히 비가 그칠 줄을 모르는 6월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장대비 소리가 집 안으로 들이닥쳤다. 당시 내가 살던 집은 13평짜리 원룸이었는데, 방은 작았지만 기다란 창이 두 개나 있어서 바깥소리가 유독 잘 들어왔다. 덕분에 비가 내리면 사운드가 남달랐다. 빗소리 ASMR을 프리미엄 서라운드 모드로 즐길 수 있었다는 게, 그 작은 집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달까.


다행히 나는 그 집의 장마가 주는 운치를 즐길 줄 알았다. 적잖이 비가 온다 싶은 날이면 방 안의 등을 모두 끄고 노란빛의 간접 조명만 켜 두었다. 그리고는 주문했다. "클로바! 킹스오브컨비니언스 음악 틀어줘." 이 유명한 노르웨이 듀오의 잔잔하지만 리드미컬한 음악이 흐르면, 이때다 싶어 탱커레이 진 조금에 토닉워터를 섞었다. 나를 위한 진토닉 한 잔이었다.


그래, 이게 혼자 사는 재미야! 그 어느 누구의 방해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홈 Bar가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책도 읽고, 일기도 쓰고, 어떤 재미있는 상상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타닥, 타닥, 우둑, 우두둑. 그 사이 부지런한 빗소리들은 가벼운 담요처럼 나만의 시간을 데워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나만을 위한 Bar라도 영업을 끝내고 다음 날을 준비해야 하는 시간은 찾아오기 마련이다. 원룸에 들이닥치는 그 빗소리라는 게 정말 ASMR 오디오라면, 내가 원할 때 끌 수 있고 소리 조절도 가능했을 텐데 그것 하나만은 ASMR과 달랐다. 비가 새벽 내내 내리치면 그 소리를 새벽 내내 들어야 하는 것도 숙명처럼 이어졌으니까. 우두!두!두!두! 하루가 멀다 하고 거센 빗소리들이 방 문을 넘어 귓가를 때렸고, 그해 여름 나는 선잠을 자기 일쑤였다.



이정도면 그냥 다들 살던데


그러다 문제가 터졌다. 그 전날 밤에도 봇물 쏟아지듯 새벽 내내 비가 내렸고, 역시나 잠을 설친 나는 늦은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눈을 뜬 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겨우 겨우 눈꺼풀을 들어 올린 나의 시야에 낯설고 이상한 것이 들어왔다. 어라? 모든 세포가 일제히 정신을 차렸다. 저게 뭐야. 웬 정체 모를 그림이지? 그래, 어떻게 생겼냐 하면 초록색을 띤 불명의 섬이라 할 만했다.


잠이 확 달아났다.


아니겠지? 설마 아니어야 해.


나는 황급히 일어나서 일단 물티슈를 챙겨, 의자 위에 올라, 코와 입을 야무지 가리고, 천장을 쓸어봤다.


웩 맞잖아!


그래 곰팡이였다. 아무래도 윗집과 우리 집 천장 사이 어딘가에 물이 흐르는 길이 있고, 그게 누수된 모양이었다. 곰팡이가 생긴 자리는 천장의 정 중앙이었기 때문에, 그밖에 다른 이유는 아닐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보기 싫은 곰팡이를 물티슈로 닦아냈지만, 남은 자리에는 누렇게 얼룩이 생겼다.


그 뒤로 내가 락스를 묻혀서 문질렀던가. 급한 불은 껐지만, 당혹스러운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곰팡이라니? 수개월 전, 이 집을 구하려고 몇 날 며칠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았는지 모른다. 당시 갓 이직한 직장의 점심시간을 반납한 채 강남구 역삼동을 누볐었다. 그래서 갖은 비교 끝에 어렵게 계약을 하고 나서는, 개중에서는 제법 괜찮은 곳을 얻었다고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코딱지만 한 원룸이라지만 이 원룸은 강남구 역삼동 일대에서 2억 이하로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룸인 게 사실이었으니까.


그때 나는 스스로를 운이 좋은 사람이라 생각했다. 거참 집 찾기도 술술 풀리네? 그런데 아니었다. 어쩌면 내가 나 자신의 안목에 속은 걸 지도 몰랐다.


‘그래, 어제 비가 너무 많이 와서 그래. 오늘만 그런 걸 거야. 오늘만.’


의자에서 조심스레 내려오며 스스로를 달래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현실 회피에 가까웠다. 난생처음 집안의 곰팡이를 본 공포에 질려서, 내 소심한 심장은 여전히 요동치는 중이었다. 곰팡이는 언제든 집안이 습해지면 다시 피어날 문제라는 걸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해 여름 비는 멎을 줄 몰랐고, 끝나지 않는 악몽처럼 천장의 곰팡이는 같은 자리에서 수차례 더 피어났다. 그럴 때마다 천장 벽지를 부지런히 닦아 냈다. 매번 낙담한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다 아무래도 녀석들의 기세를 잡기가 묘연하다고 생각했을 때, 나는 그제야 나는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 다음 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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