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집을 사고 싶어
하지만 찾아본 것이 강남구인 게 문제 였을까? 2020년 11월 기준, 역삼동 래미안 아파트 33평(공급/전용 면적:109.27㎡/84.93㎡) 면적의 가장 낮은 가격의 매물이 현금 20억을 넘어가고 있었다. 20억이라. 강남구 집값이야 비싸다는 걸 모르지 않았으니 놀라는 것도 촌스러운 일이었다. 애초에 여기서 집을 살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한 건 아니었지만, 벌써부터 유주택자가 되기 위한 관문에서 문전박대 당한 기분이 들고 말았다.
지역을 바꿔봤다. 회사가 지하철 2호선 역삼역과 9호선 언주역 사이에 있으므로 9호선 부근의 매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음, 개중 당산역이 눈에 띄었다. 2003년에 지어진 당산역 근처의 삼성 래미안 아파트의 경우, 2020년 11월 33평 기준(109.99㎡ ~ 193.83㎡) 13억에서 15억까지 호가가 형성되어있었다. 불현듯 2년 전 쯤 결혼한 고등학교 동창이 당산역 부근에 신혼집을 차렸다는 얘기가 스쳐 지나갔다.
낙담스러웠다. 어쨌거나 15억이나 20억이나, 내게는 범접할 수 없는 세계의 언어들로 느껴지는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두 아파트는 1년이 흐른 뒤 정확히 27억, 18억을 상회하는 매도 호가가 형성 된다. )
이대로는 안될 것 같은데? 내 나이와 비슷해 보이는 24평 아파트의 매매가를 뜯어봐도, 관악구나 광진구로 지역을 바꿔봐도 수도권 집값은 비슷비슷 마찬가지로 비싸기만 했다. 이상했다. 아무리 구축이라도, 외곽이라도 아주 쉽게 5억을, 7억을 넘어갔다.
'돈을 더 많이 모았어야 하는구나...'
침대에 털썩 누웠다. 뽀얀 벽지로 제 속을 가린 천장이 눈에 들어왔고,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와 안 어울리는 희미한 낙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지금 수중에 3억* 정도가 있었다면 주택 담보 대출을 받아서 수도권 외곽에 아주 작은 집 정도는 살 수 있었을텐데. 내가 가진 돈이 3억에 훨씬 못미치는구나.
(2020년 말 기준, 투기과열 지구의 9억 이하 주택 담보 대출 비율;LTV(Loan To Value ratio)은 주택 가격의 40%이다. 여기에 무주택 실수요자인 경우 10% 우대 혜택이 적용 된다. 즉, 3억이 있다면 신용 대출을 조금 보태서 6억 짜리 집을 살 수 있다는 뜻이다. )
사실 창피했다.
그동안 질렀던 비행기 티켓과, 형편없는 옷가지들, 기분을 낸다고 사모아 하루 이틀이면 탕진했던 와인들이 떠올라 가슴이 찌릿했다. 그 모든 것들은 내 인생에 다채로운 기쁨을 주는 일들이 분명했지만, 자본주의라는 사회에서 나 자신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는 일들은 아니었다. 물론 그 나름대로 기쁨과 배움이 있는 소비들이었지만, 그 모든 걸 그렇게까지 많이 할 필요는 없던 것이다.
고백하건대 그동안은 우리 나라 부동산 경제에 대해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자산 가치가 오르고 내리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자랑은 아니겠지만, 경제 소식이나 재테크에 무심했던 것이다. 월급을 받으면 어느정도 저금을 하는 게 전부였고, 주제 넘게 사치하지 않는 정도만 신경썼다. '영어를 잘 해야돼, 마케팅 트렌드를 잘 알아야해. 다양한 문학을 읽으며 삶과 인간에 대해 더 알아가고 싶어.'
20대 내내 어제 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고군분투 했던 것 같지만, 그중에 '현실 경제를 잘 알고 각종 투자로 자산을 늘릴 줄 아는 나'에 대한 희망사항은 뚜렷하지 못했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를 철학하고, 만끽하는 게 삶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의 자율성과 존엄성을 지켜줄 수단이 되어 줄 자산의 가치는 몰라봤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약간은 억울했다. 자본주의라는 내가 발딛고 서있는 이 세계에서 나는 영영 배제되어야 마땅한 사람인걸까? 일찍이 경제 논리에 영리하게 올라타지 못한 나의 부족함 때문에, 집을 가지지 못해도 할 말이 없는거라고 말해도 되는걸까?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한지 2021년이면 만 7년이 되고 있었다. 계산을 아무리 해봐도 그동안 번 돈을 최선을 다해 모았다 해도 3억은 어려운 금액이었다.
그런데도 정말 아낀다고 수도권에 집을 살 수 있는건가? 정말로 일찍이 내가 투자를 열심히 해서 돈을 불리기로 결심했다면 정말 다 해결됐을 쉬운 일이었을까? 아니 사실 이 세상에 '집'이라는 게 너무 부족한 건 아닐까? 30년 동안 간헐적으로 했어야 할 경제에 대한 고찰들이 물밀듯이 순서도 없게 밀려오는 계절이었다.
불현듯 내 또래에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 친구들을 떠올려 봤다. 결혼할 여자친구의 아버지 집을 지역 시세 보다 저렴하게 매수한 친구, 할머니가 물려주신 소형 아파트를 증여 받을 예정인 친구, 양가 부모님의 지원금에 예비 부부가 모은 돈을 보태 분양권을 매수한 친구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생각해보니 하나같이 경제적 공동체의 도움이나 협력이 있었던 친구들이었다. 물론 1인 가구임에도 청약이 당첨돼 서울 동부에 자가를 소유한 지인이 한명 떠오르긴 했지만, 아무래도 추첨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 그래, 아직은 집을 사기엔 너무 어린 나이인지도 몰라!
- 혼자라서 애초에 어려운 일일지도 몰라.
그런데 불현듯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차려졌다.
- 내가 평생 1인 가구로 살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 집은? 내 보금자리는?
- 다음 화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