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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란 Oct 30. 2022

#7. 한강과 먼 곳으로

나도 집을 사고 싶어


한강과 먼 곳으로


그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내가 가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는 아파트가 어디 있을까 생각해보니 당장에 그 '화정동'부터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서른이 될 때까지 나의 생애주기의 메인 무대가 되어 주었던 나의 고향, 화정지구. 불과 몇 계절 전에 강남구 역삼동에 있던 회사로 출퇴근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제 발로 떠나온 곳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려 한다니. 사람 일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물론 화정지구는 투자 목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상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서울의 직장인 밀집 지역인 종로구나 강남구와 그리 가깝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데다가, 주변에 큰 기업은 전무하고 오로지 아파트 단지들로만 가득찬 배드타운(Bed Town)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화정지구가 좋았다. 고향이라서가 아니었다. 몸소 살아 오며 겪은 바, 이만큼 살기 편한 동네도 적을거라는 생각을 내내 해왔다.


예를 들면 고양경찰서, 덕양구청처럼 도시의 주요 공공시설이 모여 있는 덕양구의 중심지가 바로 화정동이었다. 게다가 각종 스포츠 시설과 연극 관람 시설을 갖춘 시립 문화 시설이 존재하는 것 또한 동네의 자랑이었다. 덕분에 저렴한 돈으로 수영을 배우고, 밤이면 축구장을 빙 둘러싼 런닝 트랙에서 달밤의 런닝을 할 수 있었으니까.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에 가지 않아도, 피아니스트 이루마의 연말 콘서트를 볼 수도 있었다. 어찌보면 삶의 질이 좋은 동네였달까.


하지만 1980년대만 하더라도 화정동 일대는 온통 배밭이었다. 그러다 노태우 전 대통령 시절, 수도권은 이미 부동산 투기와 주거지 부족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었고, 당시 정부는 수도권의 주택가격안정과 주택보급율을 높여야 하는 숙제에 골몰했다. 그러다 눈길을 돌린 게 수도권 외곽의 논밭 일대였다. 농경지에 불과했던 땅들을 개간해서 아파트 단지로 채우자는 의견이 모였다. 이른 바 '200만호 건설 사업'이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일산, 산본, 평촌, 분당 등 제 1기 신도시는 이때 만들어졌다. 뒤 이어 정치적인 이유로든, 지형적인 이유로든, 그린벨트로 묶여 있어 개발이 어려웠던 농촌 지역도 다수의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화정지구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게 추진된 200만호 건설 사업은, 정치인과 소시민들의 꿈이 모이고 모여 유례 없이 빠른 속도로 그 목표를 조기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200만호 중 1호의 꿈은, 다름아닌 바로 우리집의 몫이었다.



내집 마련의 꿈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가족들과 함께 공사가 한창인 화정동 일대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엄마는 여기가 우리가 내년이면 살게 될 동네라고 말했다. 주변의 건물은 하나 같이 높아 보였고, 놀이터도 있었다. 익히 내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학교 운동장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선명하고 세련된 색깔과 디자인의 시소와 미끄럼틀이 있는 놀이터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신식이었다.


그날 엄마는 즐거웠따. 빛바랜 사진 속 그날의 엄마가 너무나 기쁘게 웃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날의 엄마를 그렇게 기억하는 게 마땅하다. 어렵사리 마련한 새 집이 완공을 목전에 두고 있을 때였으니 당연히 설레고 벅찼을 것이다. 어린 나와 내 남동생은 그날 엄마가 시키는 대로, 미끄럼틀 앞에서 영문 모를 기념 사진도 남겼다.


그것은 다달이 월급만 벌어왔다 하면 집안의 모든 대소사를 잊어 버렸던 아빠의 공이라 말하긴 어려울 것이다. 제 딴에는 버거운 청약에 도전을 하고, 알뜰 살뜰하게 돈을 아끼거나 궂은 부업을 마다하지 않으며 중도금을 치러냈던 엄마의 노력이 빛을 발한 이벤트였다. 엄마는 여느 가족들이 그러하듯 따뜻하고 안전하며, 깨끗한 집을 염웠다. 그리고 그 안에서의 단란한 가정을 꿈꿨다. 그 시절 '내집마련'에 꾸는 젊은 부모들의 꿈이란 대개 그런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엄마는 한 번 내가 서른이 된 즈음에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엄마는 20대에 결혼했어. 30대에는 집을 샀지."


서른 셋까지 결혼 계획이 없다는 딸을 향해 엄마는 늘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하지만 너댓번은 속으로 참아온 듯 했다. 결혼이나 출산을 비롯한 여성의 생애주기에 대한 전통 사회의 고집은 구식으로 평가된다는 걸, 환갑을 넘긴 엄마라 해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 얘기는 달랐다. 엄마에게는 혼자 살든 누구와 같이 살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위해 '집'이라는 자산은 꼭 필요할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결혼은 안 해도 집은 있어야 한다는 짧은 핀잔은, 그래서 내게도 싫은 소리로 들리지 않았다.


정말로 이제 나는 '생애 첫 집'을 마련하려 청약에 도전했던 젊은 엄마의 나이와 비슷해졌다. 다행인지 정말 나도 엄마와 비슷하게 집을 갖고 싶다는 꿈을 꾸게 되었다. 내 이름으로 된 자산이 없어도 마냥 편하기만 한 나이는 아니라는 걸 한 해 한 해 실감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돈은 많은 것에서 나를 자유롭게 했다. 하다못해 식사 메뉴를 고르는 것에서도, 여행지에서 얼마나 편한 숙소를 고르는지 고민하는 데 있어서도. 돈이 없다면 나는 욕망을 절제하거나, 타인의 신세를 져야 한다. 둘 다 유쾌한 선택은 아니다.


집도 그럴 것이다. 혼자 사는 이상, 주거공간을 마련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할 진대 항상 누군가의 공간을 빌려 씀으로서 느껴야 하는 불안정함을 일상의 변수로 삼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내 집이 필요하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말이다. 내 주변 친구들 역시 서서히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 10년차를 바라 보며 얼마간 목돈이 모여서, 혹은 결혼을 할 가족이 생겨서 큰 집이 필요하니까, 각자의 이유는 다르지만 집을 원하기 시작하는 나이대로서 30대 초반은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 언론에서는 연일 2030이 집을 보러 다닌다며 마치 대한민국에 커다란 문제라도 생긴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새까맣게 젊은 것들이 능력도 안 되면서 호들갑스럽게 부동산을 사려고 난리라는 식으로 말했다. 하지만 1990년 초반 내 엄마도, 첫 집에 청약을 넣을 때에 겨우 서른 셋에 불과했었다. 30대가 40대나 50대 보다 젊고 건강하다고 해서, 자신의 보금자리 없이 적당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아야 마땅한 나이라는 법칙은 그 어디에도 없다.


물론 그 당시 엄마의 염원과 지금 나의 염원에는 분명 대단히 다른 점이 존재하고 있다. 그 시절 나의 젊은 엄마는 아빠와 엄마 자신이 번 돈과, 아빠와 엄마 자신의 신용을 합쳐서 네가족이 따뜻하고 안락하게 살 집을 꿈꿨다. 하지만 나는 내가 번 돈과 오로지 나 혼자 마련한 신용으로 나를 위해서만 집을 구한다. 그 공간에서 오로지 나 혼자 편안하게 몸을 누이고, 자유롭게 시간과 생각을 누릴 수 있도록 해줄 그런 공간을 꿈꾸는 것이다.


굳이 굳이 집을 사는 2030의 욕망과 열정에 대해 지금 이 사회가 놀라워 하는 이유는, 아마 그 차이점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그렇게 자기 자신만을 위한 꿈만으로도 몇 억씩 되는 빚을 지고 몇 억씩 되는 집을 살 수 있는 거냐고. 그 마음에 놀라워하고, 한편으로는 부러워도 하고, 또 걱정도 하느라, 세상 사람들이 다들 발 벗고 나서서 그렇게 호들갑을 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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