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집을 사고 싶어
"102호요. 예."
"천장에 곰팡이가 선다고요?"
"에, 그럴 리가 없는데."
"누수요?"
집주인은 처음에는 놀란 듯했는데, 통화가 길어지자 점차 상냥함도 친절함도 점점 옅어지는 듯한 말투로 변화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재산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 탐탁지 않았던 것일까? 그로서도 나의 이런 제보가 반가울리 없겠지만, 일단 곰팡이라는 문제 자체를 꽤나 불편해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곰팡이가 생겼다는 내 말을 의심하는 것 같기도 했다. 집주인의 '그럴 리가 없는데'라는 말을 고쳐주고 싶었다.
사실 곰팡이가 처음 생겼을 때 나는 내심 곧바로 임대인에게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다. 일단 귀찮았기 때문이다. 일시적인 문제라면 대충 내 선에서 곰팡이를 없애고, 나의 생활에 집중하려고 했다. 솔직히 거기에는 문제에서 도망치고 싶은 나의 게으른 속내가 있었다. 아무래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집주인과 바로 논의를 해야 했는데, 집주인과의 대화가 스트레스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유독 그게 왜 스트레스였을까? 처음 이 집을 구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스트레스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 당시 이 집은 꽤 괜찮은 조건의 매물이었지만 다른 원룸 시세보다 약 2천만 원 정도 비싸다는 문제가 있었다. 특히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기본 옵션이 없어서, 더 비싼 매물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위치도 좋고, 크기도 좋고, 타이밍도 맞아 계약을 포기하기엔 아쉬운 부분이 컸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니, 일단 집주인에게 내가 원하는 것을 문의를 해보기로 했다. 구입한 지 10년은 더 돼 보이는 누런 에어컨은 바꿔주었으면 했고, 걸레받이가 들떠 있는 장판도 다시 손을 봐줬으면 싶었다. 중개원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꺼낸 얘기였지만, 임대인이 직접 내뱉은 대답은 간단했다.
‘이 정도면 다들 그냥 들어오던데.’
괜찮은 원룸 전세 매물이 적었던 당시에 그 문장을 향해 내가 더 원하는 것을 요구해봤자 얻을 것은 없어 보였다. 특히 당시 나는 전세 대출을 받아야 했고, 전세 대출을 받기 위해서는 집주인의 동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강남구 일대에 대출을 동의해주면서 '이 정도' 컨디션을 가진 원룸은 사실상 전무했던 것이다. 그렇다보니 간만에 마음에 드는 매물이 가진 크고 작은 안 좋은 컨디션들은 내가 감수해야 할 부분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 그런 과정 속에서 나는 집주인과 집에 대해 협의하는 과정을 '복잡하고 불편한 일'이라고 학습했던 것 같다. 이때의 기억은 시간이 흘러, 우리 집 천장에 생긴 흉측한 곰팡이 사건에서도 나의 프레임을 지배했다. 집에 관한 일은 애초에 그 집을 소유하고 있는 집주인이 갖고 있는 데다가, 나는 그걸 그냥 빌렸을 뿐이니 별 결정권이 없다고 세뇌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다름 아닌 나 자신이었다.
실제로 집주인과 곰팡이에 대해서 토론해 봤자, 내게 유리한 쪽으로 문제 해결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겪을 에너지 소비가 성가셨다. 결국에 얻게 될 이득보다 그를 위한 고단함이 클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애써 노력해봤자 ‘이 정도면 그냥 닦고 살아도 될 것 같다.’는 말을 듣게 될 게 뻔해 보였달까. 대신 그에 비하면 한번 닦고 잊어버릴 곰팡이 정도는 참을 만한 문제로 계산됐던 것이다.
물론 미리 오해하지 않게 밝혀두자면, 내 원룸의 임대인은 어디까지나 상식적인 사람이다. 그는 내가 사는 빌라의 위층에서 살고 있는 60대 남성이었는데, 항상 빌라의 청결 관리에 신경을 쓰고 계단이나 쓰레기장 같은 내부 시설의 유지 보수에 부지런했다. 빌라 주차장 사용에 대해 조금 깐깐하게 굴기는 했지만 딱히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왜 내가 임대한 공간에서 일어난 '곰팡이 문제'를 집주인에게 알리는 걸 차일피일 미뤘을까? 해결 과정이 지지부진하더라도, 마땅히 해결을 요구해야 할 문제인 것은 사실인데도 말이다.
"누가 뭘 어떻게 한 거 아닌가. 천장에서 곰팡이가 왜 생기지...?"
사실, 곰팡이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내게는 제일 먼저 넘어야 할 난관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 문제에 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처음에 곰팡이가 생겼다는 말을 전했을 때, 집주인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반응했다. 순간 나도 모르게 좌불안석이 됐던 것은 왜일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다보면 가끔 그럴 때가 있다. 무심코 빌린 책이 이미 찢기고 낙서 투성이인 것을 알게 되자, 혹시 내가 그 책을 반납할 때가 되면 사서는 나를 범인으로 생각하지 않을까 괜스레 민망해 지는 것 말이다. 그때처럼 나는 도둑이 아닌데도 제 발이 저린 것만 같았다. 그러니까, 집을 빌려 산다는 이유로 어떤 집의 결함이든 1차적 귀책사유의 책임을 의심받아 마땅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곰팡이가 내 손이나 발이 닿지 못하는 천장 중앙에 생긴 것은 차라리 다행이었다. 만약에 곰팡이가 평소 내 활동 반경과 닿아있는 벽이나 바닥에 생겼다면 어땠을까? 집주인에게 곰팡이는 내가 관리를 잘못해서 생긴 게 아니라고 해명을 하느라 진땀을 뺐을 것만 같다. 뭔가 빌려 쓴다는 것은 그런 거였다. 깨끗하게, 멀쩡하게 썼다고 증명해야 하는 일.
차라리 내가 고급 멘션에서 거액을 월세로 납부하는 부유한 세입자라면 달랐을 사정 인지 모르겠다. 그 정도 팔자면 소심할 리가 없잖아? 하지만 다행히 특유의 소심함을 꼬깃꼬깃 안 보이는 곳에 감추어 두고서, 제법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것은 나의 여러 재주 중 하나다.
덕분에 집주인은 반나절 뒤 우리 집에 바로 내려와서 문제를 검토해주었다. 다행히 천장을 찬찬히 보더니 윗집의 누수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인정했다. 휴.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집주인은 그 자리에서 문제를 수습할 시공 업자를 불렀고, 곧이어 윗집에 올라가 문제가 무엇인지 살펴봐 주었다. 내 운명에 곰팡이는 이제 다시없을 것이야.
"근데 사는 게 불편하실 테니 천장 공사를 새로는 못하잖아요. 그렇죠?.."
"도배는 해줄 건데.. 또 내가 요새 팔이 조금 저려서 병원을 다니느라 바빠서..."
"일단 한 달만 이렇게 살아줘요."
"도배는 그때 해줄게요."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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