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기다려진 이유
2022년.
서른이 되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스물아홉과 질척거리는 이별을 하고 난 뒤라 그런지 서른과의 만남은 오히려 말끔하게 이뤄졌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서른을 나름 기다려왔다.
'이 사람 힙스터 병이 또 도졌나'
싶겠지만 내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 20대는 그야말로 청춘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청춘이기에 힘든 일도 있고 청춘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도 많다. 나의 20대 또한 방황, 불안, 도피로 점철되어 있었다.
살아남기의 연속이었고,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나와 비슷한 20대를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에는 각자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의 경우, 20대의 대부분을 음악만 하며 보냈다는 것에서 비롯된다.
음악을 한다며 대학을 포기했고,
음악을 한다며 놀지도 않았고,
음악을 한다며 일도 거의 안 했고,
음악을 한다며 여행도 가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음악 한다는 걸 핑계 삼아 다른 그 무엇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사실 후반엔 음악도 그렇게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음악'만' 한 결과 회사와 계약을 하고 앨범도 냈지만
음악'만' 열심히 해서는 안된다는 걸 겨우 작년에야 깨달았다.
결국 나는 20대의 마지막 해를 방황과 도피로 가득 채우고서야 꾸역꾸역 현실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나의 가치가 지나치게 한정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외의 대부분의 곳에서는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꽤나 방황했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하지만 바닥을 치고 나니 일어서는 건 오히려 쉬웠다. 이 사람들에게 내 가치가 없다면 다른 곳에서 가치를 키우면 되는 거니까. 다행히도 사람들이 내게 필요로 하는 능력은 또 있었다. 그걸 갈고닦아 나를 다시 비싸게 만들기로 했다.
결국 내가 서른을 기대한 이유는,
나의 스물아홉이 '20대 내내 사랑하고 지켜온 일을 멈추기로 결심하게 된 해'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른이 ‘새롭게 한 발 내딛을 해’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이 모든 게 서른을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합리화일 수도 있다. 그걸 위해 나의 20대를 지나치게 비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닥을 치고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지금, 합리화를 좀 한다고 더 나빠질 게 있을까 싶다.
서른. 30. 30대.
막상 글로 적고 나니 더 무겁게 느껴지고 마는 나이이다. 하지만 난 새로운 챕터로 넘어갔다 생각하기로 했다.
2막의 9장에서, 3막의 프롤로그로.
안 그래도 좋아하는 의미부여 이럴 때 안 하면 언제 할까. 어쨌든 덕분에 정말 서른을 기대하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