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찾는 비행은 무엇일까
최근에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을 다시 읽었다. 처음 읽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는데, 갈매기 조나단이 아름다운 곡예비행을 배우며 성장하는 이야기로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의 난 1장의 내용만 이해했던 것 같다.
갈매기의 꿈은 애초에 3장으로 출판된 소설이었다.
조나단 리빙스턴은 단지 먹이를 구하기 위해 하늘을 나는 다른 갈매기와는 달리 비행 그 자체를 사랑하는 갈매기이다. 멋지게 날기를 꿈꾸는 조나단은 진정한 자유와 자아실현을 위해 고단한 비상의 꿈을 꾼다. 조나단의 이러한 행동은 갈매기사회의 오랜 관습에 저항하는 것으로 여겨져 다른 갈매기들로부터 따돌림을 받게 되고 끝내 그 무리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동료들의 배척과 자신의 한계에도 좌절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수련을 통해 완전한 비행술을 터득한 조나단은 마침내 무한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초현실적인 공간으로까지 날아올라 꿈을 실현하게 된다. 그러나 조나단은 자기만족에 그치지 않고 동료 갈매기들을 초월의 경지에 도달하는 길로 이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갈매기의 꿈 [Jonathan Livingston Seagull]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것이 3장까지의 내용인데, 작가도 잊고 있었던 4장의 존재를 50년 만에 발견해 4장을 추가해 개정판을 발매했다고 한다.
1장의 내용만 기억하고 있었던지라 2, 3장을 읽으면서도 새롭고 어려웠는데, 4장의 내용은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4장은 후대의 갈매기들이 조나단과 그 제자들을 신격화하는 것에만 집착하며 시작된다. 비행을 대하는 갈매기들의 태도가 변질된다. 조나단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들까지 서서히 수명을 다해가고 있는 데에 반해, 자신의 한계가 없다는 것을 이해하고 비행의 너머까지 볼 수 있는 갈매기들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렇게 서서히 본질의 대가 끊기고, 자신이 터득한 비행의 정수와 삶을 대하는 태도를 널리 전하고자 했던 조나단의 뜻은 왜곡된다. 비행하고자 하는 갈매기가 점점 사라지고, 조나단과 초대 제자들을 기리는 돌무덤만이 점점 웅장해졌다.
생각하는 갈매기라면 돌무덤을 보지 않으려고 하늘에서 항로를 바꾸었다. 노력하고 훌륭해지기보다는 실패를 변명하려는 이들이 허례와 미신 위에 세운 게 돌무덤이었다.
본문 127p
몸에서 힘이 쭈욱 빠지는 느낌이었다. 조나단이 전하고자 했던 비행과 지혜와 사랑은, 이렇게 영영 사라지는 것일까?
이때 나타난 청년 갈매기 '앤서니'의 존재가 너무나 위로가 되었다. 앤서니는 신성한 제자와 돌무덤을 모시는 것에 의문을 가졌으며, 조나단이 시속 320km로 날 수 있었다는 것이 만들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의구심을 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 동화는 그렇지요. 하지만 그렇게 빨리 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면, 그때는 저도 제자님의 말을 귀담아듣기 시작하지요."
앤서니는 삶이 허망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살을 시도하는데, 그 찰나 그 앞에 조나단이 나타나 굉장한 비행을 선보이고, 앤서니는 존을 따라 길을 떠나며 이야기가 끝난다.
초창기 버전처럼 3장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면 딱 "소설"같았을 텐데, 4장이 더해지면서 갑자기 현실감이 밀려왔다. 앤서니의 태도는 종교를 대하던 회의적인 나의 태도와 놀랍도록 일치했기 때문이다.
책을 덮고 나니 많은 생각이 밀려왔다.
나는 조나단이 계몽시키려 했던 그 관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태도가 되어 있나?
그를 단지 숭배하는 것에서 만족감을 느끼는 갈매기들처럼, 나도 그저 약자의 핑계로 내 세상의 조나단을 숭배하고 있지는 않은가?
앤서니에게 조나단이 나타난 것처럼, 나를 이끌어줄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주었으면 좋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어떤 비행의 형태라도 좋으니, 나도 먹이를 찾기 위한 단조로운 비행이 아닌 '나를 위한 비행'을 하고 싶다.
똑똑하고 영리하게 살지는 못해도, 멍청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역시 삶은 어려운 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