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근마켓이라는 게 생기기 전부터 중고 거래를 밥 먹듯이 하고 살았는데, 돈 문제를 떼어놓고 보면 그 이유 중 첫 번째는 다양한 보드게임을 하려 했다는 것이다. 요즈음에는 정식 한글화 보드게임이 자고 일어나면 할인을 끼고 쏟아지는 형국이라 그중에서 입맛대로 골라 사기만 해도 벅찰 지경이지만, 예전에는 뭔가 특별하고 재미있는 게임을 저렴하게 구하려면 커뮤니티 중고 장터에서 찾고, 마음에 안 드는 게임은 다시 중고 장터에 파는 게 일상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드게임을 커뮤니티에서 중고로 거래하면서 특히 좋았던 점은, 워낙 비좁은 마니아 판이라 그런지 사기나 비매너 거래자를 만난 적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 바닥에선 뭐가 없어지거나 손상되어 있으면 전부 게시글에 적어놓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박스가 얼마나 닳았는지도 써놓는 게 상식일 지경이다. 유난스럽게도 느껴지는 이 풍습은 여전히 지켜지는 편인데, 다른 상품이라면 신경 쓰지 않을 박스 자체도 수집물로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으로 취급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 문화는 미풍양속이니 앞으로도 잘 지켜지길 바란다.
한편 당근 마켓이 혜성같이 나타난 이후로 지역 기반 중고 거래가 활성화된 덕분에 보드게임은 물론이고 다른 물건도 거래하긴 쉬워지긴 했지만,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거래를 접하는 경우가 늘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은 보드게임 ‘딕싯’. 중국어 판이라기에 그런가보다 하고 택배 거래를 했는데, 받아서 보니 저질의 복제품이었다. 따져서 환불받긴 했지만, 이 일은 여전히 마음속에 교훈으로 남아있다. 아무한테서나 마니아의 시각이나 태도를 기대했다간 크게 실망할 수밖에 없으니, 당근 마켓처럼 아무나 나타날 수 있는 곳에선 주의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러고보니 보드게임 ‘텔레스트레이션’ 거래도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제법 유명한 이 게임은 단어를 보고 코팅된 수첩에 보드마커로 그림을 그려 다음 사람이 답을 유추하게 하는 방식인데, 받아서 뜯어 보니 전에 그린 그림을 하나도 지우지 않아서 수십 페이지를 일일이 지워야만 했다. 상품에 문제야 없다지만 가방을 파는데 안에 든 쓰레기를 비우지 않은 것보다 심한 처사다.
제법 싼 가격에 인수한 모니터도 약간 속은 느낌이 드는 편이다. 무슨 문제가 있다는 소리를 듣진 못했는데, 방에서 다른 기기를 켜고 끌 때마다 노이즈가 끼는 것이다. 워낙 싸게 산 데다 못 쓸 문제는 아니라 여전히 그럭저럭 쓰고는 있지만, 이런 문제가 있으면 고지하는 게 인지상정이다. 덕분에 이 거래 이후로는 중고 전자기기를 볼 때마다 어떤 문제가 숨어있지 않을지 의심하게 되었으니, 이것도 교훈이라면 교훈이겠다.
그런 한편으로 아주 기분 좋은 거래도 가끔은 있다. 작년에 수면 장애와 심리 문제의 해결책으로 ‘라이트 테라피’를 알아봤는데, 마침 당근 마켓에 필립스 라이트 테라피 조명이 나와서 얼른 직거래로 구입했다. 두어 정거장 가서 만난 판매자는 30~40대의 여성분으로, 자기가 건강식품 관련 일을 하고 있다면서 유산균을 한 박스 덤으로 끼워줬다. 심지어 상품을 넣어준 가방도 아주 튼튼하고 좋은 녀석이었다. 유산균도 맛있었고, 가방도 잘 쓰고 있다. 가장 중요한 라이트 테라피가 얼마나 효과가 있었느냐 묻는다면 정확한 실험을 거친 게 아니라 대답이 좀 곤궁하지만…… 아무튼 이런 거래는 참 드물고 기쁘다. 세상 아직 살 만하지 않은가 싶기까지 하다.
그런고로 나도 훌륭한 거래자가 되려 노력은 하는데, 아무래도 100퍼센트 좋은 거래자라고 자부하진 못하겠다. 어머니가 쓰던 지갑과 가방을 팔 때는 내 물건이 아닌지라 변색된 부분을 발견하지 못해서 차를 타고 온 사람이 허탕을 치고 돌아가기도 했고, 판매 직전에 흠을 발견해서 값을 깎아주기도 했다. 잘 튄다고 생각했던 농구공을 나가서 튕겨보니 잘 튀지 않아서 민망했던 적도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잘 사용하지 않는 카메라 렌즈를 팔았는데, 그것을 살 때 두 가지 중 뭘 살까 한참 고민한 탓에 렌즈의 별명을 다른 쪽으로 착각해서 의도치 않은 사기 판매를 하고 말았다. 연탄 19호라고 써야 할 것을 삼순이라고 판 것이다. 천만다행으로 구매자가 어차피 그 두 가지 렌즈를 다 살 생각이었고 내가 싼 값에 팔았기에 웃고 넘어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욕을 먹어도 싼 일이다. 상품 판매도 적당히 짐짝 치운다는 생각으로 할 일이 아니다.
한 달 전에는 커피용 핸드밀을 당근 마켓에 올렸는데, 저번 주에야 겨우 팔았다. 제법 싸게 올렸는데도 다들 하트만 찍고 문의를 하지 않는 묘한 상황이라 그냥 기다린 게 시간을 퍽 오래 끌었다.
한 달만에 나타난 구매자는 흥정 한 마디 하지 않고 저녁에 곧바로 찾아왔다. 나는 물건만 달랑 들고가기가 뭐해서 나름대로 예쁜 비닐 봉지에 담아서 나갔다. 구매자는 20대로 보이는 여성이었는데, 만나자마자 현금을 담은 흰 봉투를 내밀었다. 돈봉투라니!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나는 핸드밀의 구조를 간단히 보여주고 거래를 마쳤다. 그리고 한참 뒤에 거래 후기가 올라와서 보니, 설명도 잘 해주시고 너무나 고마웠다고 적혀 있었다. 그 정도로 설명을 자세히 하진 않았는데? 기껏해야 상식선이었는데? 싶어서 놀랍기도 하고 고맙기도 했다. 아마 그 분은 몇 번의 거래를 거치면서 거래 매너의 기대값이 많이 낮아진 것 아닐까? 아무튼 이 정도의 매너로 서로 기뻐할 수 있다면 이것도 중고 거래의 복이 아닌가 싶다. 앞으로 좋은 인간이 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좋은 거래자 정도는 간신히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동네 중고 거래가 활성화된 덕분에 지하철 입구 같은 핫플레이스를 지나자면 가끔씩 쇼핑백 같은 걸 들고 누군가를 만나면서 굉장히 반가워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요즘 세상에 생판 모르는 남을 만나면서 그렇게 반기는 모습이 또 있을까? 누군가는 별 호들갑이라거나 어차피 잠깐 거래만 하고 헤어질 사이인데 그렇게까지 감정 교류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로 짧고 간단한 교류도 갈라진 땅에 떨어지는 단비가 되기도 한다. 금문교에 자살하러 가던 사람 중에 누군가 한 명이라도 내게 미소지어준다면 돌아가겠다고 결심한 사람도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다들 사기만은 치지 말았으면.
*추신: 며칠 전 구하기 힘든 게임이 장터에 있기에 문의를 넣었는데 답이 없어서 팔렸으면 팔렸다는 소리라도 해주지, 하고 매너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한참 지난 뒤에 어머니가 갑자기 쓰러지셔서 경황이 없었다는 답이 오더군요. 이미 새 상품을 주문한지라 미안하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쾌차하시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매사 쉽게 화내고 욕할 일은 또 아니군요.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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