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미니멀리즘 사상에 경도되어 틈만 나면 물건을 정리하거나 버리거나 팔아서 빈 공간을 확보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독서와 보드게임처럼 생활 공간 확보의 대척점에 있는 취미를 갖고 있자니, 물건을 악착같이 정리하지 않으면 정말 큰일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탓이다.
소비 생활은 하면서 물건 정리를 하지 않는 것은, 극단적으로 비유하자면 끊임없이 고칼로리 음식을 먹으면서 운동은 하지 않는 격이다. 구입과 정리의 결과는 칼로리의 법칙보다 정직해서(호그와트가 아닌 이상 물리적으로 정직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기적으로 정신차리고 점검하지 않으면 삽시간에 책장이 늘어나고 벽이 사라지고 물건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몇 년 동안 한 번도 손대지 않은 물건의 집세까지 내고 살 필요는 없다든가, 설레지 않으면 버리라든가…… 이런 식의 격언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순 없겠지만, 버릴 물건을 버리거나, 적어도 공간 잠식을 덜 하는 방식으로 보관하는 게 확실히 낫긴 할 것이다. 게다가 주거 환경이 앞으로 나아질 거라곤 죽었다 깨어나도 기대하기 어렵고, 이사를 가든 뭘 하든 짐은 적을수록 좋다.
각설하고, 최근에 미니멀리즘의 광풍에 휘말린 물건 중에는 농구공이 있었다. 공주머니에 넣어서 뒷베란다에 대충 걸어놓고 문자 그대로 거들떠보지도 않은지 10년은 된 물건이다. 거슬러 올라가면 고등학교 때 산 것일 텐데, 코스트코에서 샀는지, 학교 근처에 있던 스포츠용품 전문점에서 샀는지 기억이 명확하지 않다. 다만 농구공 주머니만은 스포츠용품점에서 산 게 확실하다. 하교길에 농구공 주머니를 휘두르며 발로 차고 놀다가 주머니와 끈의 연결부가 찢어져서 공이 날아가는 바람에 기겁해서 쫓아갔던 기억이 난다. 그런 무익한 짓을 대체 왜 하고 다녔는지 의문인데,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시절에도 걷는 내내 신발주머니를 발로 차고 다녔다. 이때부터 억압된 분노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일까?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학교 운동장이 아주 비좁고 우레탄으로 코팅되어 조금이라도 농구를 하는 게 지극히 당연한 필수 교양에 가까웠다. 바닷가에서 자란 소년이 자연히 수영을 하게 된 것과 비슷하다. 체육 시간에도 교과 과정을 배우지 않을 때면 농구를 했고, 휴일에도 딱히 뭐 할 건 없고 친구들이랑 재미나게 놀고 싶을 때는 집 전화로 연락해서 농구나 하자고 부르곤 했으니 그렇게 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나저나 ‘주말에 할 게 없어서’ ‘집 전화로 연락해서’ ‘학교에 모여 농구를 했다’니, 지금으로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군.
그러나 이렇듯 숨쉬듯 자연스러운 생활 체육의 광풍도 고등학교를 떠나면서 잦아들 수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시간이 남으면 술을 마시지 어떻게 농구를 한단 말인가? 그리하여 농구공은 완전히 쓸모를 잃고 뒷베란다의 자리를 차지하는 오브제로 전락한 끝에 이렇게 미니멀리즘 사상의 척결 대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쓸데없는 농구공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 가장 빠르고 간편할까? 버리면 버리는 대로 비용이 들고, 실상 멀쩡한 물건이라 아깝기도 하다. 결국, 요즘 들어 당연해진 수순대로 당근마켓에 올리게 되었다. 시세를 알아보니 새것이 3만원 이상이라 일단 반값인 15000원에 올리고, 천천히 값을 깎기로 했다.
그리고 중고장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종종 그러하듯, 농구공 몫의 자기 비하를 시작했다. 고작 이따위 물건을 15000원에 올리다니, 다들 비웃고 넘어갈 거야. 지금이라도 값을 깎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러다 아무도 안 사면 무료나눔을 해야 하나? 요즘 시대에 농구공은 줘도 안 쓰는 물건 아닐까?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하는 식으로.
연락은 다행히도 하루만에 왔다. 한 시간 뒤에 집앞으로 올 수 있다기에 약속을 잡고, 바람을 넣고, 정성껏 닦고, 식사 시간 도중에 뛰어나가서 거래했다. 상대는 마스크를 쓰긴 했어도 아주 젊어보이는, 어려보인다고 해도 좋을 청년 혹은 청소년이었다. 새것으로는 보이지 않는 오토바이를 타고 왔고, 헬멧을 쓴 여성이 동행했다. 엄마나 누나는 아닐 테니 여자 친구였으리라. 그는 바쁜 것인지 농구공을 꺼내보곤 바람은 들어있냐고 물으며 바로 돈을 줬다.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부터 이미 중고 거래의 귀공자라 불린 나는(거짓말이다) 그 부주의한 행태에 크게 당황해서 확인을 해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농구공을 튕겨 봤는데, 내 기억보다 잘 튕기지 않았다. 바람을 넣는다고 넣긴 했는데 아파트에서 튕겨보지 못해서 무책임하게 대답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그도 당황하고 나도 당황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깎아달라고 하거나 안 사겠다고 하면 요구를 모두 수용할 각오를 굳혔다. 하지만 그는 농구공이 생긴 이상 펌프도 구비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한 것인지 그대로 구입했고, 나는 이상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 돌아왔다.
그리하여 3만원 쯤에 사서 10여년을 함께했던 농구공을 15000원에 팔게 된 셈인데, 시간이 지나며 생각해보니 아무리 500원 비싸다고 식사 메뉴를 바꾸는 처지라 해도 좀스러운 짓을 했구나 싶었다. 구매자가 학생이면 당연히 돈도 없을 테고, 연애 중이면 이래저래 돈 나갈 일도 많을 것이며, 만약 오토바이가 배달 등의 아르바이트에도 쓰이고 있다면 그 돈은 더더욱 피같이 귀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중고 거래를 하다 보면 인심 좋은 사람들은 상대가 학생이라고 깎아주기도 하고 멀리까지 와줬다고 깎아주거나 덤을 얹어주기도 하는 법이다. 나도 작년에는 건강 식품을 다룬다는 판매자가 파는 라이트테라피 램프를 사면서 유산균을 덤으로 받았고 한 통을 먹는 내내 은근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생활이나 재정에 별 타격을 주지 않는 정도의 친절만 베풀어도 타인에게 값 이상의 기쁨을 줄 수 있는데, 먼저 그런 친절을 베풀지 못한 게 후회스러웠다. 친절도 자꾸 베풀어야 필요할 때 쓱 꺼낼 만한 순발력이 다져지는 모양이다.
그래서 바람이 좀 빠지는 것 같다는 연락이 오면 곧바로 돈을 모두 돌려줄 작정이었는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무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발로 차다가 농구공 주머니의 끈이 떨어진 날, 집에서 온갖 기술가정 기술을 총동원해서 다시는 끈이 떨어지지 않도록 치밀하고 단단하게 꿰매어 놓았는데, 그때의 고생이 앞으로도 빛을 발하면 좋겠다.
*추신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특별상을 받은 본작, "쓸모는 없지만 버리기도 아까운"이 개정되어 "아끼는 날들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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