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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과자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

-소풍 버스는 광란의 과자 파티장이었다

by 이건해



근래에 들어서는 ‘초가공식품’의 위험성이 잘 알려져서 ‘과자’라는 것이 대체로 해롭고 먹지 않는 게 훨씬 나은 악의 축이라는 인식이 퍼져있지만, 과거에는 과자란 ‘밀가루 튀김이고 열량도 높아서 다이어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정도로만 비난받았다. 따라서 이를 악물고 체중을 감량중인 사람이 아니라면 그 정도의 문제는 쉽게 무시할 수 있었다. 먹으면 무조건 맛있는 음식을 ‘살찐다’ 정도로 피하다니 얼마나 유난스러운가? 그래서 어린 시절부터 과자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가급적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가 생일 선물로 과자 선물세트를 사오면 신이 나서 먹어치웠고, 심부름을 하고 잔돈을 받으면 치토스 따위를 사먹곤 했다. 그때는 스마트폰처럼 쾌락을 빠르게 얻는 수단이 없었던 터라 과자 먹기가 지금보다 압도적으로 즐거운 콘텐츠였다.


그러나 마음 편히 유희의 일종으로 과자를 사먹는 생활은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거의 맥이 끊겼다. 그 전에 이미 300원이던 과자값이 500원으로 폭등해서 타격이 심했는데, 돈이 귀하다는 걸 체감하기 시작하자 ‘학교에서 군것질따위 쓸데없는 일로 돈을 써선 안된다’라는 절대적 규칙까지 머릿속에 자리잡은 탓이다. 그래서 평소에 친구가 먹는 과자를 얻어먹기만 했지, 내가 사서 먹던 과자를 나눠준 기억이 거의 없다. 친구들에게는 좀 면목없는 짓을 했다 싶은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먹을 것에 굳이 돈 쓰지 말자는 신조는 요즘에도 친구들과 식사할 때 사이드 메뉴를 먼저 제안하지 않는 습성으로 고스란히 유지되고 있다. 평생 고칠 수 없는 정신적 핵심 교리가 된 모양이다.


그러나 그런 나조차 아무 죄책감 없이 과자를 마구 먹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버스 타고 멀리 놀러 가는 시간’이었다. 이때도 버스에 갇혀 있는 시간 동안 즐길 거라곤 ‘포켓 체스’ 같은 조그만 보드게임이나 조그마한 흑백 액정이 달려 열댓가지 시답잖은 게임이 돌아가는 게임기 따위를 제외하면 군것질 정도였던 터라 졸다 일어나서 괜히 과자 하나 뜯어 먹는 게 최고의 낙이었다(중학교 때까지 게임보이 같은 고성능 게임기는 언급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때문에 이 순간만은 과자 섭취가 대단히 정당한 행위였고, 정당하다 못해 일종의 의무같기도 했다. 마치 잠들어있지 않으면 누군가는 꼭 과자를 먹어야 버스의 평화가 지켜지는 것처럼 과자를 먹었던 것이다. 게다가 과자란 컵라면처럼 강한 전염성이 있어서, 옆에서 과자 봉지 뜯는 소리가 나면 어쩐지 견딜 수 없어 나도 뜯게 되고, 결국에는 잠잠했던 버스가 광란의 과자파티장으로 변하곤 했다. 광란의 파티답게 교류도 활발해서 같이 앉은 친구와 과자를 먹다 보면 의자 사이 틈으로 훔쳐보던 뒷자리 놈들이 하나만 달라고 손을 내밀기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간혹 배포가 큰 친구는 과자를 뜯어서 뒤로 돌리라고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내 기억으론 초콜릿이 들어가는 과자가 주로 그렇게 배포의 대상이 되었다. 어째선지 ‘미쯔’가 그렇게 돌곤 했는데, 덕분에 내가 사먹은 미쯔보다 얻어먹은 미쯔의 갯수가 압도적으로 많을 지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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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일본어번역가. 황금가지 공모전 우수상 수상. 브런치 출판프로젝트 특별상 수상. 2024년 교보문고 스토리대상 공모전 단편 우수상 수상. 협업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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