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오래된 등산화와 탈수 위기를 모두 체험해 보다
안산과 인왕산에 다녀온 뒤로는 또 2주간 등산을 쉬었다. 그 사이에 영화 ‘파묘’의 팝업 스토어에 갔다오기도 했고, 공모전에서 입상이 좌절된 소설을 손보기도 했다. 한편으로 몇 번 신지도 않았는데 낡아서 밑창이 벌어진 컬럼비아 등산화의 밑창을 다시 붙였고, 유명한 등산화는 중고장터에서 눈에 띄는 족족 사다 신어보고 후기를 남겨야겠다는 리뷰어의 집착에 사로잡혀 ‘호카’의 트레일러닝화인 스피드고트 미드를 싸게 사서 신어봤다. 이것은 아웃도어 신발의 디자인을 완전히 뒤집어버린 호카 제품답게 멋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가벼웠다. 한쪽이 210g에 불과했으니 공기로 만든 수준이었다. 이 녀석에 대한 이야기는 이걸 신고 산에 갔을 때를 위해 남겨두자.
이 시기에 새로 들인 등산화 중에는 한국 등산화 브랜드 중에 가장 오래 된 ‘송림’ 등산화도 있었다. 송림 수제화는 무려 1936년에 시작되어 지금껏 이어지는 기업으로, 산악인 허영호 씨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애용한 것으로 유명하다. 신발 관리나 등산화에 대해 찾다 보면 유튜브에서 알고리즘으로 제작 과정을 다룬 다큐를 추천해주기에 나도 잘 알고 있었는데, 중고 장터에서 송림의 오래된 가죽 등산화가 우연히 포착돼서 냅다 사버린 것이다. 유명 브랜드 등산화를 대부분 신어보기로 작정한 이상 한국에서 가장 유서깊은 등산화를 놓칠 수야 없는 일이었다.
다만 주문한 등산화를 받아보니 어찌나 오래된 물건인지 가죽은 굳어가는 중이었고, 밑창은 이미 플라스틱처럼 굳은 뒤였다. 나는 가죽 로션으로 유분을 공급하고 밑창도 온갖 방법으로 살려볼 궁리를 했는데, 굳은 밑창을 되살릴 방법은 창을 아예 바꾸는 것 말고 없는 듯했다.
결국 개화산에서 짧게 신어본 뒤로 송림 수제화에 문의하고 수표교의 매장으로 직접 찾아갔다. 그닥 넓지 않은 건물의 2층에 자리한 매장은 양쪽에 온갖 신발과 작업도구와 상장과 사진 등등이 빼곡하지만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카운터 너머에는 유튜브에서 몇 번이나 본 4대 사장이 서있었다. 유명인을 만난 기분이었다. 내가 전화로 얘기한 등산화를 꺼내어 보여주자, 그는 자기들도 구할 수 없는 옛날 물건을 어떻게 구했냐며 놀라워했다. 그가 감탄하며 보여준 설포에는 송림수제화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는데, 이 번호의 국번이 269다. 80년대 부터 90년대까지 사용된 서울 국번이니 대략 30년 이상 된 물건인 셈이다(나중에 더 알아보니 80년대 모델이었다). 나는 좀 우쭐해졌지만, 딱히 물려받은 것도 아니니 자랑스레 여길 건 아니라 금방 정신을 차렸다.
이 등산화에서 손볼 부분은 두 가지, 밑창과 굳어가는 가죽이었는데, 밑창 교환은 여전히 가능하다 했다. 이제 호환되는 밑창이 없거나 낡아서 교체 불가능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문제는 가죽이었다. 사장은 여기저기를 만져보곤 발목의 쿠션도 살아있고 가죽도 아직 살릴 만하다며 가죽 크림이나 밍크 오일을 지속적으로 발라주면 다시 부드러워질 거라 했다. 나는 등산화 270을 신어야 새끼발가락이 편하므로 265인 이 등산화의 발볼을 좀 넓힐 수 없을까 물었으나, 그는 가죽이 오래되어 굳은 상태면 갈라질 수 있다며, 발이 밀리지 않게 단단히 조이는 게 최선이라 답했다. 하기야 40년 된 신발이니 되살리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다. 나는 7만 원에 수선과 택배 배송을 의뢰하고 돌아왔다. 주워듣던 것보다는 좀 비쌌지만, 두꺼운 밑창을 한땀한땀 찔러 꿰매는 과정의 고난을 영상으로 여러 번 본데다, 직접 밑창을 손본 경험도 많은 터라 불만스럽진 않았다. 전통있는 수제화점을 직접 보고 낡은 가죽 신발을 되살릴 방법을 알아낸 것만 해도 큰 수확이었다.
그리하여 며칠 지난 뒤 받은 등산화는 말끔한 새 밑창을 달고 있었으며, 가죽도 제법 말끔해진데다 끈도 새것이 되어 있었다. 이것만해도 거짓말같은 변화였다. 잘 만든 가죽 등산화의 매력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엉망이 된 것 같아도 결국은 살아난다. 살아있는 물건이 아닌데도 끈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후로 이 등산화에 종종 밍크 오일이나 가죽 로션을 바르고 적절한 색상의 슈 크림까지 사용해가며, 신발을 마치 골룸이 반지 아끼듯 정성껏 관리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신기에 큰 불편이 없는 수준으로 되살릴 수 있었다. 발이 밀려서 새끼발가락이 찍히는 문제는 발등쪽에 부드러운 쿠션을 붙여서 해결했다. 표준에서 벗어난 발 모양으로 잡다한 신발을 신어보며 질환과 싸우는 동안 익힌 꼼수가 제법 도움이 된 셈이다.
(클래식 등산화에는 중후한 운치가 있다)
그리하여 이 등산화를 신고 갈 목적지로는 ‘불곡산’을 택했다. 양주 불곡산. 도봉산 역에서 다섯 역 더 간다. 이쯤 되면 확실히 서울 산은 아니고 근교 산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쨌거나 1호선만으로 갈 수 있는데다 높지도 않으면서 암릉이 빼어나다고 하니 가볼 만도 했다. 물론, 모르는 산을 신어본 적 없는 등산화로 간다는 건 다소 과감한 짓이다. 도중에 발이 아프면 대단히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심각한 험산도 아니고 466미터로 소소한 정도이니 처음 신는 클래식 등산화를 믿어볼 만하다고 판단했다.
그나저나 양주역은 멀었다. 일기를 쓰고 한숨 자고 일어나도 될 지경이었다.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11시 46분에야 역 밖으로 나설 수 있었는데, 대로 너머의 풍경이 나같은 서울 촌놈에게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평평한 들과 그 너머의 산들을 제외하면 건물이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부 개척 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나 볼 만한 광경이었다. 이 정도의 벌판을 본 적이야 있지만, 그 옆을 직접 내 발로 걸어보는 것은 대단히 오랜만이었다. 논산 훈련소 시절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광활한 평지가 대도시 거주자를 놀라게 했다)
들머리까지는 거리가 제법 되는 터라 40분 가량을 걸었다. 이제 기온은 31도에 달했고, 햇빛을 가려줄 사물은 아주 앙상한 가로수 뿐이라 우산을 써야만 했다. 얼굴과 목은 여름용 넥게이터로 가렸다. 그런 모습으로 보행자 없는 길을 하염없이 걷자니 황야의 방랑자가 된 기분이었다. 여름에 들머리가 먼 산에 간다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불곡산 입구는 화강암으로 말끔히, 엄숙한 느낌이 들 정도로 잘 포장해둔 계단길이라 오르기가 어색했다. 산의 입구가 아니라 국립묘지에 들어가는 길 같았다. 젊은 등산객 두어 명이 가벼운 차림으로 오가는 게 보여 그나마 좀 마음을 놓고 걷기 시작했다. 길은 아주 완만한 숲길로, 산책 삼아 가볍게 걸을 뒷산 수준에서 벗어나지 않았는데...... 그런 수준이 이상할 정도로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낮은 산이라지만 이렇게까지 오르막이 안 나올 수 있나? 지도를 열어본 나는 그제야 등산로가 아니라 둘레길로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15분쯤을 되돌아가니 잘 보이는 곳에 세워진 표지가 있었다. 내가 갔어야 할 길은 오른쪽이었다. 마음이 바쁘거나 길에 미혹되면 이렇게 귀신에 홀린 듯한 일이 대낮에도 일어나니, 롤플레잉 게임처럼 표지판이 보이면 일단 멈춰서 읽어보는 게 좋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지나친 갈림길)
30분을 허비하고 등산로를 오르기 시작하니 영 맥이 빠졌다. 기분만 맥이 빠지는 게 아니라 실제로도 이미 지쳐 있었다. 길은 적당히 바위가 섞인 흙길이었으나 옆의 나무들은 키가 작고 태양은 정수리에서 내리쬐어 그늘이 적었고, 덕분에 산인데도 황야를 걷는 기분이 길게 이어졌다. 나는 잠시 주저앉아서 숨을 돌려야 했다.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출발할 때부터 지쳐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때가 한두번이 아니긴 했지만, 이날은 정말로 후회가 심했다.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각자의 자리에서 먹고살 돈을 벌거나 앞길을 닦거나 시원한 곳에서 휴식을 취할 때 왜 나는 고행을 자초해서 햇살 아래 달아오른 산을 오르고 있는가? 이미 몇 번이나 나름대로 해답을 내놓은 의문인데도 회의감이라는 감정은 제어할 수 없었다. 그만큼 벌써 죽을 맛이었다.
묘사할 것도 없는 평이한 오솔길이 계속 이어졌다. 오솔길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트여있어 숲의 쾌적함이 없는 길이라는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겠다. 경치가 트인 능선도 아니고 시원한 계곡도 아닌 길이라 도저히 즐길 수 없었다. 거대한 짐을 진 행상이 지나갔다. 벌이가 좋지 않아 빠르게 철수하는 모양이었다. 그만큼 뜨거운 날이었다.
(숲이지만 뜨거운 황야같은 길이 이어졌다)
이를 악물고 걷던 나는 결국 두 시 반쯤 그늘의 벤치 위에 늘어졌다. 두 시간만에 이렇게까지 지친 것은 처음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사먹었어야 했다. 후회막급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첫사랑과 출판사에 투고한 원고와 떠나간 아이스크림은 돌아오지 않는다. 욕이 절로 나왔다. 나는 양갱과 물을 섭취하고 누워서 한참을 쉬었다. 그것 말고 달리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차가운 계곡물이라도 한줄기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없는 것을 갈구해봐야 괴로울 따름이다. 나를 회복시켜줄 외부 요소라곤 벤치 하나뿐인 이곳에서 나는 내가 가진 것만으로 자신을 추슬러야 했다. 이게 바로 도시에서 벗어나 누리는 자유의 반대급부다. 자연의 어디든 지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겨울은 움직여서 스스로 열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여름은 땀을 내는 것 말고 몸을 식힐 방법이 없으니 단단히 준비해야 했다.
다행히도 일사병 단계까지 가지는 않은 듯, 그렇게 20분쯤 쉬자니 대충 기력이 돌아왔다. 지독했던 태양의 열기도 한풀 꺾였고, 어디선가 바람도 불곤 했다. 나는 다시 일어나서 걷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패턴으로 우는 매미 소리가 청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 컨디션과 가장 뜨거운 시각이 문제지, 산 자체에 문제가 있진 않을 것이다.
30분쯤 더 걸어 올라가자, 슬슬 암릉이 길의 대부분을 점유하기 시작했다. 길 옆이 크게 트여 경관도 훨씬 나아졌다. 심지어 바위 틈새에 뿌리내린 침엽수들도 멋들어지게 휘어져 있어 초입과는 다른 세상인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고난의 시간이 끝나고 보상만이 남은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건 터무니없는 착각이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은 행복하게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사진을 찍는 맛도 좋았다.
(멋들어진 나무들과 상봉)
3시에 도착한 정상부는 제법 험하게 치솟은 바위 봉우리였다. 주변 경관에 감탄하며 다가가니 근처에 모여앉아 쉬는 중년 등산객들이 보였다. 이런 돌산에 흔히 있는 마당바위는 없지만 봉우리 밑에 땅이 넓게 펼쳐져 있어 평범한 뒷산 같은 느낌을 주었다. 정상 인근이면 바위에 앉는 게 제맛이라 생각해왔는데, 이렇게 친근한 공간도 나쁘지 않았다.
상봉으로 올라가는 경사는 제법 심했으나 그만큼 데크로 정비가 잘 되어 있었다. 심지어 고무 매트까지 촘촘히 깔아둬서 눈비에도 미끄럽지 않을 듯했다. 사랑받는 산이 분명했다. 나는 난간을 잡고 몸을 끌어올려 상봉(470m)의 정상석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을 둘러봤다. 풍경이 각별했다. 서울 산에서 아래를 조망하면 어김없이 빌딩과 아파트로 빼곡한 도시 풍경을 보게 되는데, 이곳은 시야의 상당 부분을 전원에 가까운 모습이 채우고 있었다. 나즈막한 건물들 옆에 초록의 호수같은 논밭이 자리했다. 같은 높이에서 보는 논밭은 스쳐지나는 배경으로 느껴왔는데, 산 위에서 내려다본 논밭은 목가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했다. 그냥 초록색으로 칠한 것처럼 보일뿐인데도 마음 한구석을 평화로운 온기로 채우는 힘이 있었다. 감사할 만한 풍경이었다.
(상봉에서 본 도시와 논밭의 평화로운 모습)
상봉은 도무지 평평한 곳을 찾을 수 없는 봉우리라 대충 바위에 걸터앉아 삼각김밥을 빠르게 집어먹고 다시 움직였다. 불곡산의 주요 봉우리로는 상투봉과 임꺽정봉이 더 있다고 하니 서둘러야 했다. 불곡산 정상부가 이 정도로 무난하다면 나머지 봉우리도 금방 갈 수 있을 거라고 예상하면서…….
(험악한 정상부지만 정성껏 정비해놓았다)
그런데 걷다보니 이게 보통 착각이 아니었다. 여기부터는 마냥 즐기면서 다닐 만한 길이 아니었다. 봉우리에서 다른 봉우리로 가는 길이야 대체로 험한 편이지만, 여기는 보통 험한 게 아니었다. 내리막은 바위를 대충 두들겨 깨서 마구잡이로 깔아놓은 것처럼 거칠었고, 이어지는 오르막은 밧줄을 잡고 호치키스를 밟아야 하는 수준이었다(ㄷ자로 박아놓은 발판을 흔히 호치키스라고 부른다). 이 순간만큼은 등산이라기보다는 등반에 가까웠다. 재미는 있었지만 여름날 배낭을 매고 감행하기에는 상당히 지치는 활동이기도 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어느모로 보나 과격하게 가혹한 오르막)
참고로 이날 나는 플리스를 처음 만들어낸 폴라텍 사의 여름용 원단인 폴라텍 델타로 만든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미세한 요철 가공이 된 덕에 다른 옷보다 덜 치덕거린다는 게 확실한 장점이었다. 땀이 끝없이 흐르는 날씨가 되면 어떤 속건 티셔츠든 비슷한 지경이 된다고 생각해왔으나 이만하면 확실히 다르다고 할 만했다. 덕분에 여름에 어떤 상의를 입을까 하는 고민에서는 졸업하게 되었다.
한편으로 첫 테스트에 돌입한 송림 등산화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히 안정적이었다. 사이즈 때문에 발가락 움직일 공간이 거의 없고 새끼발가락에 자극이 누적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불편한 부분도 없거니와 반복적으로 암릉을 딛는 충격도 완전히 방어했고, 미끄럽지도 않았다. 나는 부드러운 중창 부분이 얇고 밑창이 두꺼운 클래식 등산화가 무거워도 신뢰성이 대단히 높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제법 뿌듯했다. 딱히 내가 손본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낡은 물건, 고전적인 물건이 요즘 물건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노화’라는 단어를 슬슬 남의 일로 여길 수 없게 된 자의 감정 이입일지도 모른다.
3시 45분에 상투봉에 도착했다. 상투봉은 봉우리라기보다는 바위 능선의 일부 같은 곳으로, 높이는 431미터인데 체감으론 600미터쯤 되었다. 그만큼 매콤한 맛을 보며 올라왔다는 말이다. 풍경을 몇 겹으로 덧칠한 산과 산 그림자 사이로 다시 전원 풍경이 보였는데, 이번에는 하늘의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전란의 끝을 알리는 듯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바위 능선 위에서 보기에 이만큼 훌륭한 광경도 얼마 없을 것이다. 등산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풍경을 서울 근교에서 볼 수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았을 테니, 혼자서도 산을 찾을 정도로 등산에 매료된 건 역시 행운이다. 뻗어버리지 않고 몸을 잘 다독여 여기까지 온 것도 뿌듯한 일이고.
(상봉에서 이어지는 매끈한 바위 능선)
상투봉에서 이어지는 넓고 긴 암릉을 지나 임꺽정봉으로 출발했다. 명목상의 정상이 상봉이고 실질적인 정상은 임꺽정봉이라고 할 만하다고 알고 있었기에 제법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가는 길이 상상을 초월했다. 여기저기서 ‘암릉 맛집’이라고 하더니, 그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주장하듯 험한 바윗길이 이어졌다. 그냥 일자로 험하거나 가파른 게 아니라, 복잡하게 내려갔다가 치솟은 바위 옆의 길 같지 않은 경로를 따라 올라가는가 하면 여기저기 자잘하게 솟은 바위에서 바위로 옮겨다니기도 해야 했다. 앞서서 가는 등산객 한 명이 없었다면 여기가 길이라는 걸 확신할 수 없을 만한 곳도 있었다.
(상식적으로 안 다닐 곳이 길이라고 정비되어 있다)
그렇게 어지럽게 걷다 4시 18분쯤 임꺽정봉이 잘 보이는 암릉에서 숨을 돌렸다. 임꺽정봉은 높이 솟은 봉우리이긴 했으나 대부분 나무로 감싸여 길이 눈에 띄진 않았는데, 보다 보니 숲 위로 튀어나온 거친 절벽에서 뭔가 꾸물거렸다. 장산범은 아닐테고 대체 뭔가 싶어 실눈을 뜨고 집중해 보니....... 그건 난간을 잡고 산을 기어오르는 사람이었다. 즉, 길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절벽이 바로 내가 가야 할 길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수필에서 ‘뛰기 전에 보기’와 ‘보기 전에 뛰기’ 중 어느 것이 옳은 자세인가 다룬 적이 있다. 나는 갈 방향 정도만 잘 봐두고 멀리 있는 길이 어떤지는 닥쳐보기 전까지 모른 채 움직이는 게 낫다는 입장이다. 그래야 헤매지도 않으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일에 겁부터 먹는 일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미래를 구체적으로 알수록 철저히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뭐든 정보가 많을 수록 좋겠지만, 대비를 할 수 있을 만큼 다 한 뒤라면 미래를 알아봐야 불안만 가중되고 미지의 영역을 나아가는 즐거움은 줄어든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임꺽정봉으로 가는 암릉을 미리 봐버린 건 상당히 부정적인 일이었다.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길을 어떻게 가나 맥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즈음 700ml가량 챙겼을 물도 거의 다 떨어져 불안감이 가중되었다. 이렇게 낮은 산에서 탈수의 위기를 직면하게 될줄은 상상도 못했다 여름의 기온과 식수 소모를 적절히 가늠할 줄 모르면 많이 챙기기라도 했어야 하는데, 실수도 이런 실수가 없다. 온도에 따른 식수 소모량은 내가 꼭 미리 알아야만 하는 정보였다. 1.5리터는 챙겼어야 했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물이 완전히 다 떨어진 것은 아니고 이 봉우리만 오르면 하산 시작이니 운동 강도를 조절하며 이 난관을 헤쳐나가기로 한 것이다. 이렇게 써놓으면 마치 ‘덤벼라, 임꺽정, 한 판 붙자!’하고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 같겠지? 그러나 실제로는 ‘임꺽정 선생님,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에 가까운 자세였다. 그만큼 이 봉우리의 암릉은 가파르고 거칠었다. 그냥 가파르기만 한 게 아니라 길고 구불거려 끝이 잘 보이지 않는 탓에 영원히 이어지는 듯한 착각을 주었다. 잘 정비된 난간뿐만 아니라 밧줄까지 있었으나 오히려 그게 더 험악함을 실감하게 만들었다. 북한산 칼바위 능선이나 도봉산 Y계곡도 대단한 암릉이긴 하지만, 칼바위 능선은 이렇게까지 광대하지 않고 도봉산 Y계곡은 발을 디딜 곳들이 명확하다. 나는 빈번히 쉬어가며 몸을 끌어올렸다. 불곡산이 ‘암릉 맛집’이라고? 맛집이 아니라 핵불닭 볶음면이 나오는 집이라고 해야 마땅했다.
(이렇게나 단순무식하게 매운 암릉은 찾기 힘들다)
그리하여 4시 55분에 간신히 임꺽정봉(449.5m)에 올랐다. 무시무시하게 거친 길을 올라야했던 것 치고는 상당히 공간이 넓게 트인 곳이었고, 정상석도 제법 큼지막했다. 정상석 뒤에는 약간 위로 솟은 조망점이 있어 느긋하게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봉우리 방향이 다른 만큼 상봉보다 전원이 더 많이 보였는데, 슬슬 기울어가려는 햇살을 받은 멀칭 비닐은 호수처럼 빛났고, 겹쳐진 산들은 멀어질수록 물결처럼 흐려졌다.
(가혹한 등산 끝의 최종 지점)
그러나 그 평화로운 광경을 오래 즐길 수는 없었다. 시간을 즐기고 있기엔 너무 더웠다. 나는 보기에 흉하든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심정으로 바지를 걷어붙였다. 30도가 넘는 날씨에 긴 바지를 입고 등산처럼 과격한 활동을 하는 건 상당히 불편하고 심지어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라는 걸, 여름이 지나갈 무렵에 등산을 시작한 나는 이때까지 몰랐던 것이다. 나는 남아있는 물을 모두 마시고, 곧장 하산을 시작했다. 시간을 끌수록 위험해지는 죽음의 타이머가 본격적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산과 산 사이에 담긴 도시와 논밭)
정상부의 멋진 바위지대를 지나가자 고무가 깔린 데크 계단이 나왔다. 앞이 완전히 트여 가까이는 산을, 멀리는 마을과 논밭을 조망하며 날아가는 듯한 곳이었다. 불암산 정상부가 이와 비슷하긴 하지만, 이 정도로 광활하게 트여 있진 않다. 나는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며 걸었다. 멀리, 넓은 풍경을 보는 것만으로 이렇게 감동하진 않는다. 이보다 더 높은 산이나 전망대가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도 불곡산의 계단에서 본 풍경이 단연코 압도적이었던 것은, 시야의 반을 채운 나무의 초록 위를 그보다 약간 위에서 내려다볼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근경에서 중경까지를 숲과 산이 메우고, 그 너머에 서울보다 한적한 마을과 논밭의 풍경이 엿보이는 이 길은, 거친 암릉과 함께 불곡산을 확고한 명산으로 만들고 있었다.
(불곡산에서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계단)
그러나 감탄의 시간도 그렇게 길진 않아서, 데크길에서 내려온 뒤로는 완만하지만 편치 않은 길이 이어졌다. 바위를 대충 깨부숴서 쏟아놓고 흙과 낙엽을 뿌려놓은 듯한 길이 길어서 걷기가 도통 힘들지 않았다. 전투화 못지 않게 바닥 충격을 잘 막아주는 클래식 등산화가 아니었다면 제법 고통스러웠으리라. 등산화 유행은 점점 예쁘고 가볍고 캐주얼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만, 족저근막염에 시달려본데다 이런 너덜길을 질색하는 나로서는 역시 이렇게 육중한 쪽이 좋다. 4륜구동 차량으로 험악한 비포장길을 거침없이 달리며 ‘이 맛이지!’하는 효능감을 맛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 요상한 감성을 이해할 것이다.
그렇게 물 한방울 없는 상태에서 하산하기까지는 한 시간 좀 넘게 걸렸는데, 아예 대로변까지 빠져나오니 6시 32분이었다. 기록으로는 총 6시간 41분이 잡혔다. 이 날씨에 이렇게 험한 산을 물도 부족한 상태로 6시간 넘게 다녔다는 건 무모한 일이었다. 그 사실을 증명하듯 근처에 화장실이 있기에 소변을 보니 아주 진한 황색이었다. 갈증을 느끼는 정도를 지나 가벼운 탈수 단계에 들어선 것이다. 나는 보통 산은 겨울에 위험하다고 여기지만, 여름이 훨씬 위험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닐 일이다.
그나저나 그렇게 늦은 시각은 아니었는데도 대로변의 음식점은 영업이 끝났다고 했다. 근처 가게도 다 닫혀 있었으므로, 나는 편의점에서 이온음료를 사서 마시며 버스 정류장까지 한참을 걸었다. 이 시각에 이런 문전박대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도심에서 멀어질수록 가게가 문을 일찍 닫는다는 걸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도 양주역 근처는 좀 괜찮겠지 싶었는데, 애초에 음식점이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그나마 등산객들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가게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주문이 끝났다고 했다. 이쯤 되니 억울하고 화가 날 지경이었다. 세상이 무슨 의도를 갖고 나를 박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장사에 큰 도움이 될 정도로 여럿이 온 것도 아니고 나는 누추한 등산객 한 명에 불과하니 장사를 하는 시간에 문전박대 당한다 할지라도 이상한 일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탐색을 포기하고 역사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게 되었다. 깔끔하게 잘 만든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가게로, 딱히 특출나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정도였다. 알코올로 지친 영혼을 어루만져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이 정도면 준수하다고 생각해야지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시간에 열린 가게가 없다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도시 출신의 오만한 고정관념의 결과일 테니, 방향도 없이 원망을 쏟아내는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편이 정신에 이롭다. 게다가 한 시간 전만 해도 탈수증을 걱정하고 있지 않았는가 말이다.
아무튼 이 날은 등산 1년차가 아직 안 된 초보 등산객으로서, 자신이 여전히 초보라는 걸 지독하게 절실히 느낀 날이었다. 그동안 새로운 등산 코스를 찾아다니고 새로운 등산화, 등산복을 테스트하며 나도 제법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고 은근히 자부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산속의 여름 한 번 체험하지 못한 생초보였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잡다한 장비가 아니라 충분한 식수와 식량이었던 것이다. 자연 앞에선 겸손해져라, 겸허해져라, 이런 얘기들을 흔히 하는데, 이것도 괜히 나온 얘기가 아니었다. 산 곳곳에는 광대한 아름다움만 숨은 게 아니라 죽음도 그림자처럼 깔려 있었다. 비유하자면 폭포로 이어지는 강에서 노니는 것과 마찬가지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숨막히게 아름답지만, 적절히 노를 젓지 않으면 조만간 정말 숨이 막히게 된다. 생명이란 항시 죽음으로 향하는 과정중에 있고, 결말을 유예하며 나아가고 있을 따름이라는 말이다. 그 사실을 단적으로 가르쳐주는 여름 산의 공포와 경이를 동시에 맛본 나는, 집으로 가는 내내 크게 반성하면서 지독한 여름산의 더위를 이겨내기에 적합한 장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교훈
굳은 통가죽은 가죽 크림이나 밍크 오일로 살릴 수 있다.
클래식 등산화는 멋과 견고한 방어력, 그리고 재생 가능성에 특장점이 있다.
표지판이 보이면 방향을 꼭 확인하자.
폭염에는 땡볕을 걷지 않는 게 이롭다. 걸어야 하면 밝은 색 모자와 옷으로 방어하자.
물은 과하게 많이 챙기자. 가늠이 안 되면 6시간에 2리터라고 생각하는 게 안전하다. 이후 코스, 온도, 물 소비량을 기록해서 적정량을 찾으면 된다.
28도쯤 되면 반바지를 입고 다니는 게 낫다.
번화가 밖에서 일요일 늦은 저녁에 식당을 찾기란 지독하게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