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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May 07. 2022

네잎클로버

야근 작업을 마친 뒤 새벽에 집으로 들어온 이엘은 그날 아침 주말 인지도 모르고 평일처럼 눈을 떴고 알람은 울리지 않았지만 알람이 울린 것처럼 정신을 차렸다.

토요일임을 깨달았던 건 폰을 보기도 전이었다. 그러자 어떤 질서나 규칙처럼 스르르 머리를 스쳤는데 그 전기신호는 약속이 있는 주말이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엘은 한동안 침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못했다가 더 가까울 정도일지 모르겠다. 30분 정도 흘렀을까 전화가 왔었는데 이엘의 폰은 무음이었으므로, 이엘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이엘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시간은 11시경이었고, 그즈음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서 며칠 전 사둔 샐러드와 요거트를 꺼냈다. 샐러드는 싱싱하지 않았지만 먹을만하다고 판단한 이엘은 서둘러 먹기로 했다. 약속을 준비하기 위해서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식탁에 앉아 그제야 폰을 보니 부재가 떠있었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보니 바쇼였다. 약속을 당일 취소한다는 메시지가 떠있었다. 바쇼가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기 때문에 메시지 그대로 사정이 있겠거니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무슨 큰일이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된 이엘은 바쇼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집에서 푹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이엘은 넷플릭스를 켰고 무엇을 볼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요즘 인기 있는 드라마 1화 시작을 눌렀다.

드라마 1화를 시작하는 건 별 것 아닌 것이지만 사실은 대단한 일이다. 만약 재밌으면 지금부터 나와있는 모든 것을 본다는 뜻이고 그렇지 않다면 1화를 고르는 선택을 하기 위해 고민했던 시간이 모두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1화를 누름으로써 이엘은 자신의 선택이 틀린 게 아님을 그리고 제발 재밌어라 같은 기도를 했다. 

드라마 1화의 주요 스토리는 신의 존재에 대한 대척점을 가진 주인공들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신을 믿는 것과 부정하는 것의 오래된 클리셰적 내용이었다. 드라마 속의 남자는 신은 죽었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살인자 중의 살인자인 우리는 어떻게 안식을 얻을 것인가라고 외쳤다. 

이엘은 생각했다. 언젠가 들어봤던 니체가 했던 말이었다. 수 세기 동안 신을 믿지 않게 된 사람들, 신이 없다고 생각하며 의심하는 속 마음들을 억눌러야 했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더 이상 인간을 구원해주지 않는 신의 모습으로 신은 죽었다고 선언했던 니체였다.

그리고 흥미는 조금 있지만 생각보다 실망을 한 듯한 표정이었지만 이엘은 더 보기로 했다. 드라마 속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우리가 그토록 믿어왔던 신은 인간에 의해 탄생했고 사라졌습니다. 이제 인간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여기 모두는 그럴 수 있습니까? 이 오래된 거짓말을 거짓말이라 말할 수 있고, 거짓말이 밝혀졌으니 진실된 것을 위해서 책임질 수 있는 인간일 수 있습니까?

믿음으로 일관해왔던 삶의 자세가 거짓이라고 하자 이 전까지의 질서가 깨져 혼란한 세계가 되고 그 세계에 인간은 모든 가치를 잃은 듯 허무와 무의미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이엘은 샐러드를 먹다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삶의 의미가 신에 의해 결정되던 세상에서 인간이 할 수 있었던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신이 죽었다고 말함으로써 인간은 어떤 것을 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여전히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나를 지탱해오던 세계를 스스로 부정한다면 결국 나는 나일까 이엘은 오래전에 누군가의 질문을 떠올렸다. 3년 전 그러니까 지금은 헤어진 남자 친구였다. 그와 만들었던 세계를 떠올린 건 우연일지도 모르겠다. 그가 떠올라 사진을 찾아보았다. 분명 오래된 사진이 아니다. 2019년 어느 날의 사진들이었다. 함께 웃고 있는 사진들을 보니 새삼 시간이 흐름으로 변한 것을 보고 있었다. 3년간 많은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3년간의 시간 동안 심정의 변화를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이엘은 많은 책을 읽어서 지식이 늘어난 것도 아니고 단순히 나이가 들어서 갑자기 삶의 지혜가 생긴 것도 아니었다. 단순한 사진들을 본 것뿐이었다. 이엘은 순간적으로 집이 이상해졌음 느꼈다. 사진 속에 그가 온전한 사람의 형태로 이엘의 눈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잠깐 걸을까?”

이엘은 그를 계속 쳐다보았다.

“잠깐이면 돼 어차피 나는 조금 있다 사라질 거니까”

예전의 이엘이었다면 현실이 아니라는 것을 파악하고 받아들이지 못했겠지만 시간이 흐름으로써 이엘 자신도 변했다. 이엘은 지금 현재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니체가 말했다. 현재에 충실하라고.

“좋아”

이엘은 그와 발맞춰 걸었다. 3년 전 그와 매일 걷던 길이었다. 분명 익숙했는데도 어색함을 느꼈던 이엘은 한 템포씩 늦는 그의 걸음이 낯설었다. 이 전엔 빨랐던 그의 발걸음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기억하고 있던 것과는 다르지?”

“응. 시간이 지났으니까. 원래 그렇게 발걸음이 느렸나?”

“아니, 느려졌어. 발걸음이 느려질수록 좋은 거더라.”

“저기 보이는 곳 끝까지 가면 사라지는 거야.?”

“드라마 많이 봤네. 맞아. 저기가 내가 갈 수 있는 최대치야. 어때 옷도 이제는 잘 입었지?”

“그래서 천천히 걸었군 좋아. 더 천천히 걷자 옷은 파란색이 너무 눈에 튀어.”

“꼭 그런 말 하더라. 오랜만에 만났는데 칭찬해주나 했다.”

“사람 잘 안 변해. 그래도 그 셔츠는 마음에 드네.”

그가 길을 가다 네잎클로버를 찾아서 보여주었다. 쭈그린 자세로 오라고 손짓했다. 이엘은 저런 모습이 있었나라는 의문이 생겼다. 저 사람은 그가 아니다. 내가 만든 그의 형상일 거야 라는 생각을 했다.

“방금 의심했지? 나는 네가 만든 형상일 거라는 거?”

이엘은 당황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맞아, 네가 만든 형상이자 나야. 나는 나로 존재하고 있지만 네가 인식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않는 존재이기도 해 나는 너에게 네잎클로버를 주러 왔어.”

“무슨 뜻이야?” 

“약속 지키고 싶었어.”

“무슨 약속?”

“네잎클로버 준다는 약속. 주고 싶었었어.”

“언제부터.”

“그 뒤로 문득”

“잊고 있었네. 나도 네잎클로버 기다렸었는데.”

느려진 걸음은 최대한 느려졌다. 급기야 슬로비디오 같은 우스꽝스러운 걸음 같아졌다.

그래서 그와 이엘은 서로 그들의 모습을 보고 풉 웃었다. 

“길이 거의 다 끝났어.”

“놀랄 줄 알았는데 덤덤하게 받아들이는 거 보니 너도 변하긴 변했구나.”

“시간이 흘렀으니까..예전처럼 겁이 많진 않아. 신은 있다고 생각해? 갑자기 질문하고 싶어 졌어.”

그가 이엘을 가만히 쳐다봤다. 이엘은 그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그가 이엘의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주었을 뿐이었다.

“잘 있어.”

그가 사라지자 이엘의 공간은 다시 집이 되었고, 먹다 남은 샐러드와 빈 요거트가 있었다. 그리고 네잎클로버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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