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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Apr 08. 2024

사랑하는 일



아침 일찍 눈이 떠져서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니 9시 20분이었다. 주말이긴 했지만 늦잠을 자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간 밤에 생각했던 오늘의 스케줄을 이어서 생각했다. 효인 씨와 두 번째 약속을 잡았다. 사실 심장이 밤새 뛰었다. 긴장일까, 아니면 설렘일까 싶었지만 결론은 긴장에 가까웠다. 효인 씨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넋 놓고 바라봤다. 그렇지만 나는 효인 씨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았다. 지구가 달의 한 부분만 볼 수 있듯이. 나는 그 이후로 내내 효인 씨를 생각했다. 신기하게도 우연히 마주쳤다. 우연히 지하철 2호선에서, 우연히 학교 근처에서, 우연히 홍대 거리에서. 아니 이렇게 계속 우연히 만날 거면 약속을 잡아서 만나요라고 하자 효인씬 알겠다고 말했다. 우연이 3번 겹쳐서 재만남이 이뤄진 것이다.

약속된 모임 1번, 우연한 만남 3번, 약속된 만남 1번, 우연과 약속의 간극이 좁아져 가는 순간이 좋았다. 효인 씨는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특히 웨스앤데슨의 그랜드부다페스트호텔, 개들의 섬, 프렌치디스패치, 애스터로이드시티 같은 영화들을 좋아했다. 나는 그 영화들을 잘 모르지만 어쩌면 그 영화들이 효인 씨를 닮았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알지 못하는 세계를 누군가에 의해 듣는다는 것은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려지지 않지만 그려질 것 같은 모호성이 나를 사로잡는다. 문득 웨스앤데슨의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보고 싶어 지네요. 저도 봐야겠어요. 효인 씨는 말했다. 취향만 맞으면 몇 번을 봐도 안 질릴 영화들이에요. 종훈 씨는 무슨 영화 좋아하나요? 음.. 저는 가장 최근에 본 영화가 범죄도시네요. 하하 너무 오래됐죠? 범죄도시 4가 곧 나온대요. 재밌겠죠? 그럼요. 저 범죄도시도 좋아해요. 보러 갈까요? 아니요 그날 약속이 있어서. 어? 이제 곧 나온다고 해놓고. 농담이에요. 같이 가요. 나는 그녀와 가까운 미래를 그려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효인 씨는 책에 대해서도 말했다. 책에 대해서 말할 때는 나도 아는 책들이라서 알아들을 수 있었다. 고전들, 그러니까 데미안, 이방인, 페스트, 위대한 개츠비, 동물농장, 노르웨이의 숲. 더 대화를 이어가야지 했는데 저는 한국소설은 못 읽겠어요란 말에 서운했다. 왜요? 한국소설이 얼마나 재밌는데 재밌지 않나요?라는 질문에 효인씬 제가 보기엔 다 비슷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아요 내가 들어왔던 불운한 이야기들, 가족에게 느꼈던 서운한 감정들 굳이 찾아보고 싶지 않은 그런 거 있죠라며 효인 씨가 말하는 한국소설의 이미지는 뚜렷해 보였다. 그 부분 때문에 좋아하지만 뚜렷하기보단 모호한 부분이 매력이에요라는 말을 나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우린 주로 보는 게 소설이네요. 집에 있는 책이 거의 다 소설이에요라고 말하며 우리는 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우리 좀 걸을까요? 걷기 좋은 날씬데.


청계천을 걷기에 효인 씨의 말대로 좋은 날씨였다. 바람도 그리 세지 않았고, 기온도 적당했기 때문에 옷이 두텁지 않아도 충분했다. 사람들이 앉아 있을 만한 곳에 앉아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저 사람들도 우리처럼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대화를 하고 있을 것 같았다.

a라는 선택을 하면 정말 느리지만 어쩌면 인생의 가치를 찾을지도 몰라요. 어쩌면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채로 최종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구요. b라는 선택을 하면 최종 목적지라는 곳에 최대한 빠르게 도착하는 거예요. 효인 씨는 어떤 쪽을 선택하고 싶어요?

저는 돈은 b지만 삶은 a로 가고 싶어요. 그런데 이건 누구나 할 쉬운 선택이잖아요. 쉽다는 건 함정이 있다고 생각해요. 분명 이 생각에 함정이 있을 거란 생각. 그러니까 저는 a로 할래요. B는 어딘가에 무언가를 놓고 올 것만 같아서요.

그렇지만 a도 찾지 못할 수도 있고 무언가를 놓고 올 수도 있잖아요. 무언가를 놓고 온 것 같은 적이 있었어요?

글쎄요.. 무언가를 놓고 온 적이 있는지 모르겠어요.

혹시 모르니까 찾아보고 싶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청계천에 흐르는 물을 보니까 문득 생각나서요. 느리게 흘러가니까 안전해 보이니까, 무언가를 놓는다고 해도 다시 찾으러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청계천에 빠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네요. 안전한 곳이네요. 그래서 좋은 곳이죠? 네.

우린 계속 걷고, 나는 나의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문득 청계천에서 생긴 사랑이야기가 하고 싶어졌다. 그 사랑이야기의 주인공은 사실 죽을병에 걸린 비련 여자 주인공이다. 주인공인 여자인 이유는 내가 만드는 이야기니까 내 마음이다. 이런 마음은 언제라도 쉽게 변하겠지만, 사실은 이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어쨌든 죽을병이라는 걸 받아들인 주인공은 평소 하고 싶은 걸 하기로 하며 버킷리스트를 적기 시작했다. 그중 첫 번째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혼자 여행 가기였다. 아이슬란드 화산 구경하기, 남극여행 가서 펭귄보기, 터키여행 가서 열기구 타기였다. 그녀는 모아둔 돈을 모두 모아 환전을 하고, 여행짐을 싸고 난 다음 떠나기 전 일주일 전 날, 청계천에 들렀다. 청계천을 걷다가 앉았서 쉬다가를 반복하며 여행도 여행이지만 여행이 끝난 후에도 살아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물이 나는 것을 참았다. 참다가 참다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내가 사랑했던 전 남자 친구들을. 그땐 그렇게 사랑했는 데로 시작해서 결국 저주와 복수로 끝났다. 그러다 문득 한 명이 더 떠 올랐다. 그중 한 명은 헤어졌지만 지금도 서로를 응원하는 한 명이었다. 죽을병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 그녀가 처음으로 연락한 것도 그였다.  

잠시만요. 왜 꼭 죽는 병이 있어야 할까요? 사랑을 증명하는 일은 죽음을 예고하며 시작해야 하는 것일까요?

효인 씨가 말했다.

글쎄요. 저는 90년대식 발라드 같은 사랑이 좋아요. 그런가요? 네 효인 씨도 저에겐 90년대식 발라드 같아요. 하긴 제가 90년대에 태어나긴 했어요. 그렇다고 90년대식 발라드는 너무 촌스러워요. 저는 노래도 90년대 발라드 불러요.

듣고 싶네요.

그럼 할까요?

여기서?

어때요.

잠시만요 죽어서도 하늘에서도 사랑하나요? 그리고 기다리나요? 기다렸다가 다시 만날 때까지?

맞아요 딱 그 내용입니다.

촌스러운 게 아니라 무서운거였네요.

사랑도 무서움을 이겨낸 사람만 했나 봐요.


*


평양냉면 좋아해요?라고 효인 씨가 물었다. 네 좋아하는데 자주 안 먹어요. 자주 안 먹으니까 좋아하나 봐요. 좋아하면 자주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자주 먹어서 좋아한다던지.

그런가요?

종훈 씨는 저 자주 안 봐도 되나요?

나는 곧 평양냉면을 자주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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