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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Mar 13. 2024

잊힌다는 것, 잃는다는 것



그는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침대 밑에 놓아둔 물을 마셨다. 자는 동안 쌓인 쓸쓸함을 청소하는 듯 했다. 제법 따스한 바람이 불던 4월과 5월 사이의 어느 날, 그는 아주 천천히 거리를 응시하며 1년 전 오늘 혜연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가 그 날을 기념일처럼 저장한 것은 아니지만 전 날 밤, 울린 알람의 메시지를 보게 되었다. 특별한 날은 아니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혜연+1년’
특별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도 기억하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하루에 식사는 몇 칼로리를 먹는지, 운동횟수, 달리기 km, 걸음 수, 몸무게, 누구와 만났는 지 무슨 이야길 했는지, 돈은 얼마를 썼는 지, 책은 무엇을 읽었고, 영화는 무엇을 보고, 음악 플레이 횟수까지 모두 그가 기록하는 것들이었다.
가끔은 사람들이 했던 말들도 머릿속에 기억했다가 기록하기도 했다. 사람들과의 시간에서 가장 그 자신에게 의미 있는 말들과 행동을 머릿속에 저장하고 끊임없이 반복했다. 그러면 새로운 세상이 그의 세계에 펼쳐지기도 했다. 그는 이별 전으로 돌아가게 되는 문장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혜연과 반지를 맞춘 지 두 달이 지났다. 그동안 반지가 커진 건지 아님 내 손가락이 작아진 건지 자꾸만 반지가 빠지려고 한다.’
그는 반지가 맞지 않아서 씻을 때 고생한 기억을 떠올렸다. 한동안 그는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려는 반지를 조심하며, 반지에 맞춰 생활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마음 한 켠에는 어쩌면 이 반지처럼 우린 안 맞을지 몰라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가 다니던 회사가 상황이 좋지 않아 그만두게 된 날, 혜연이 코로나에 걸려 많이 아파했다. 혜연이 코로나에 걸리기 전, 그 역시 코로나를 한 번 경험했기 때문에 그 아픔은 알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코로나에 걸려 더 힘들 혜연에게 가는 길에 그는 혜연의 말들과 그 때의 생각을 짧게 메모했다. 그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인지 몰랐던 혜연은 병원에 혼자 가려고 했다. 혜연은 그를 보자마자 반가움의 안도감을 보이며 안심하는 듯했지만 한 켠으로는 걱정하는 표정을 그는 읽을 수 있었다. 그는 치료를 위한 행위를 한 것도 아닌 데도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동시에 걱정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 마음을 이어가는 동안에도 그는 혜연과 헤어진다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혜연은 그에게 너무나 좋은 연인이었다. 그가 가진 것이라고는 혜연을 위한 작은 것들이었다. 혜연은 그에게 받은 작은 것들을 큰 것으로 만드는 연인이었다.

우진아.
응?
너는 잊히는 것과 잃는 것 둘 중에 선택하라면 뭘 선택할 것 같아?
잃는 것 선택할래.
잊히는 것보다 잃는 것이 더 낫다는 거지?
잃으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잊혀지면 처음부터 없었던 것 같네.
우진아..
응?
그러면 나 잊어줄래?
  
그는 그 날 혜연과의 대화 이 후 계속해서 그 때의 그 순간을 떠올리며 했던 말과 해야 했던 말과, 하지 않은 말들과, 하지 못 했던 말을 되풀이했다. 잊어달라는 말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연을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연을 잡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연에게 욕이라도 하면서 아님 나를 욕하라고 하면서 혜연을 보내지 않아야 했다. 그는 어떻게든 혜연을 잡고 싶었다.

‘노래를 듣다 보면 자동적으로 분류가 되지 않아? 퇴근할 때 듣는 노래, 새벽에 듣는 노래, 슬플 때 듣는 노래, 자기 전에 듣는 노래들, 그 중에서 힘이 필요 할 때 힘이 나는 노래를 듣고 싶어.’
평소 노래를 듣지 않는 그에게 그런 노래 분류법은 생경했다. 그러나 그는 혜연이 말한 힘이 나는 노래가 있다면 들려주게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는 혜연에게 힘이 되 줄 노래를 쉽게 찾지 못했다.

1시간이 지났을까, 오후의 시간은 4~5월의 잔바람이 아니라 5월의 여름을 알리는 초더위가 그를 감싸기 시작했다. 여름에도 겨울에도 손이 차서 호주머니에서 손을 빼지 못했던, 그래서 5월의 날씨를 유난히 반가워하던, 한 낮의 열기가 가시지 않아 초 열대야가 지속되던 여름날 밤을 뜨겁게 사랑하던, 혜연의 계절이 어느새 성큼 오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 수 있었다.

우리 이제 서로를 잃은거지? 잊은 게 아니라?

그는 혜연을 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은 이미 정해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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