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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Apr 23. 2022

낮맥 하는 시간

주말 사이 강한 바람을 동반한 비가 쏟아져 거리의 벚꽃나무에 꽃들은 모두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날이 가장 좋았을 때 출근하는 심정은 출근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모두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모습이 교차된다면 더 더욱.

제히는 모니터 안의 커서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아보였다고 했다. 그도 그럴것이 할당된 디자인 작업은 아무런 기준이 없는 주관의 영역에 있었고, 더 더욱이나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보고까지 남은 시간은 약 9시간 정도였는데 꼴딱 밤을 새면 완료는 가능했다.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었다. 주말이지만 작업을 이어가야 했던 자신의 지난 주의 처지를 말하며 이제는 벚꽃이 다 떨어졌다며 난 언제 남자친구랑 벚꽃 보러 가냐며 한탄하는 제히의 모습은 제히답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그게 이렇게 오전부터 술을 마셔야 할 일인거지?”


제히를 다시 이런 식으로 만날 줄 몰랐다. 길모퉁이 뭐 그러니까 오래된 골목의 어딘가에서 골목길 어귀 어딘가 가로등 불빛이 달빛처럼 살짝쿵 표가 나는 그런 시간에.

나는 퇴근길에 익숙한 길을 따라 인적이 없으므로 휴대폰에 집중하면서, 어제의 첼시가 홈경기에서 대패를 한 사실을 분개했다. 이길 때는 한 없이 이 팀을 사랑하였고, 질 때는 무기력한 이 팀을 한없이 분개해하는 순간을 교차하면서 말이다. 하이라이트에서는 3번째 골을 먹혔을 때 어느 누구도 수비에 대한 열망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 자릴 책임지고 있는 감독조차 멍하니 그 광경을 보는 모습을 보고는 한 없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제히를 만났다. 나는 이렇게 혼자의 세상에 빠져 분개하는 순간에 아무도 없을거라 생각했던 좁은 골목 길에서 나를 아는 누군가를 만날 확률은 없음에 가까우므로 생각지도 못한 만남을 한 것이다. 제히가 재현오빠라고 물음표를 붙이며 불렀는데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와 박자감이라 휴대폰에서 고개를 드는 순간 제히를 확인함으로써 이렇게도 사람을 만날 수 있구나란 생각을 했다.

그 이후 한 두 번은 술 약속으로 만났다가 이내 자연스럽게 술 먹으면 피토하는 심정으로 서로의 불만을 들어주는 상대가 되었다. 규칙은 없었지만 시기상, 그러니까 이번엔 제히의 차례였다.  


“저요. 지난 주에 벚꽃 핀 거리로 갔다가 일부러 출근 늦게 해봤거든.”


“인사평가 안 좋아질텐데, 오전 반차를 쓰지 그랬어. 그거 다 인사에 반영 되서 연봉이랑 진급에 문제 생긴다 너. 한국사회에서 퇴근은 몰라도 출근시간 지키는 건 얼마나 중요한 일인데 출근 시간 전에 자리에 안 앉아 있으면 불성실한 직원이로군 이렇게 생각한단 말이야.” 


제히는 극혐 하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맥주를 다시 몇 모금 연속으로 들이켰다.


“그런 소리 마요. 진짜 극혐중에 극혐이야. 저 오라는 곳 많아요. 아무튼 벚꽃이 핀 거리를 걷는데 세상이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아무래도 인간이 없어져야 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거야. 왜 인간이 편하려고 만든 차가 계속 도로로 다녀야 하는거지? 왜 자연을 밀어내고 건물들이 계속해서 세워져야 되는거지? 왜 건물 안에 많은 냉장고와 에어컨들이 오존층을 뚫는거지?” 지구가 망했으면 좋겠다 이렇게요.”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놀릴 거리가 떠올랐다.


“너처럼 속세에 물든 애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시대를 잘 타고 난 건 어느정도는 받야 들여야 하지 않을까.”


“뭐 그렇긴 하죠. 나는 명품도 좋고 화장품도 좋은거 쓰고 싶어. 그런데 다들 그렇게 쓰는데 다들 그런데 나도 안 그러면 억울 하니까. 내가 뒤쳐지는 건 아닌데, 나는 그만큼 일하고 벌고, 난 할부도 없고 나는 쓸 수 있는데 무조건 아끼라는 말도 너무 싫어요. 남한테 좀 신경쓰지 좀 말고 자기 일이나 잘하지.”


말을 끝맺은 뒤 제히는 다시 맥주를 시켰다.


“맞아 강요할 순 없지. 나만 환경 생각한다고 에어컨이나 히터 끄자 할 수 없으니까. 그래도 일 잘 마무리 했으니까 이렇게 이번 주말은 낮술 할 수 있는거니까”


“이렇게 술을 먹고 있는게 기분이 반반이에요. 왜인지는 들어봐요. 봄이 와서 날이 따뜻해지니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꽃이 참 이쁘긴 한데 나이가 들수록 바라보면 기분은 좋은데, 그래서 그 순간은 행복하거든요. 그런데 내가 주말동안 일을 하고 난 다음 이번 주말은 친구랑도 약속을 잡았어, 그리고 같이 놀기로 했어. 그렇게 다 계획했었는데 이게 뭐야. 벚꽃은 다 떨어지고 없지, 친구는 남자친구 만나러 갔지. 나는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고 주말이 망했어요.”


“망했다고 하기엔 이미 4잔째야 제히야. 그리고 뭐 어때 벚꽃은 내년에도 또 필거고 지금은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


“내 주말!! 벚꽃 좀 돌려줘. 진짜.”


“됐어. 벚꽃 안돌아와. 맥주나 마셔.”


맥주는 멋진 술이다. 처음 술을 배울 때 먹었던 쓰고 맛없는 알콜향 가득한 소주와는 달리 맥주는 탄산이 있으면서 적당한 알콜이 있는데다가 소주처럼 쓰지 않기 때문에 술이 약한 사람도 즐겁게 마실 수 있는 술중의 술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적당히 취기를 주면서 부담 없이 마실 수 있는 술이 있을까 싶은. 그래서 맥주를 마시는 것을 제히와 나는 좋아했다. 가끔 맥주를 전혀 못 마시는 사람도 있긴 했다. 이를테면 맥주보다 더 알콜도수가 쎈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러나 희안하게도 소주는 마셔도 취하지 않는데 맥주는 취한다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이런 탄산의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여유롭게 맥주 마시는 거 오랜만이다. 그 친구는 맥주를 못 마셨어.”


“왜요.”


“몰라 맥주만 못 마셨어.”


“그게 이별 이유는 아니죠?”


지난 주 벚꽃 가득한 거리를 보며 1년 전 이 맘때를 떠올랐던 것도 제히가 지난 주와 지금까지 머물러 있는 생각이 약간 비슷해서 취기가 있는 겸 말을 꺼냈다. 많은 이야기가 생략된 말이었다. 


“직접적인 이유는 아니지만 간접적인 것도 있지 않을까?”


“너무하네 이사람.”


나는 너무하네 이사람에란 말에 이번엔 아마 내가 들어봐 제히야로 시작해서 이러면 나를 조금 이해가 되지 않니? 라는 말로 끝맺는 것으로 아주 길게 말 할 차례인 듯 하다.

4월의 봄이다.     

낮술은 하루를 두 배로 만드는 마법이다- C2H2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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