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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Jun 11. 2023

순간의 순간

이런 순간이 순간의 순간이야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정우는 이해하지 못했다. 어떤 말은 필름처럼 자동 반복되고 재생된다. 이별을 직감하게 되는 순간, 으레 그렇듯 정우는 그때 그 순간의 모든 것을 순간으로 기억했다. 그러니까 하지 않아도 되는 생각들만 잔뜩 떠오르던 날이었다유난히 한가로웠던 오후를 보내던 정우는 문득 그 말을 했던 현주가 이제는 없음을 새삼 깨달았다. 쌓인 설거지를 하면서, 아무렇게나 내버려 뒀던 옷들을 모아서 세탁기를 돌릴 때도 그 말은 필름처럼 반복되었다. 쌩쌩 돌아가는 세탁기를 보고 있다가 방 청소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방은 청소기를 돌려야 한다. 화장실은 화장실 세재를 풀어서 빡빡 밀어야 한다. 그러나 어디부터 할지 정해야 했다. 어차피 두 곳 모두 할 셈이었다. 오늘은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므로. 그래도 결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우는 줄곧 결정이 필요하다고 해도 필요하면 필요한 대로 결정하지 않는 버릇이 있었다. 역설적이지만 우선순위의 가치를 매기고 싶지 않았다. 현주는 그런 정우를 이기적이라 말했다. 꼭 이럴 때마다 나한테 판단을 맡기더라. 나만 나쁜 역할 맡으면 되는 거지? 정우는 눈을 찔끔 감았다. 현주와 헤어지기 전 현주의 마지막 말이었다. 꼭 그렇게 말해야만 했을까. 마지막인 만큼 좋게 말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정우는 한숨을 길게 쉬었고 아무 생각이 나지 않길 바라면서 청소기를 들었다. 정우는 그 순간 다시 생각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을까. 너와의 좋았던 감정은. 오랜만에 돌리는 청소기는 방안의 모든 먼지가 빨려 들어가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조용했던 주변에 유일한 소리였다. 정우가 처음에 사려고 했던 청소기는 지금 청소기가 아니었다. 한 단계 더 좋은 청소기였다. 그 청소기를 사려고 하다가 후기를 보고 한 단계 낮은 청소기를 샀다. 역시나 기대 이하였다. 성능이나 기능면에서. 먼지함을 비우는 것도 불편했다. 청소기를 쓸 때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원래 사려고 했던 걸 살걸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정우는 다시 현주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성운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왜? 만나기 싫어서?


아니 순위를 첫 번째로 해보고 싶어서. 


그동안의 첫 번째 순위는 뭐였는데.


그게 없었어. 모두 다 중요하니까.


청소는 30분 동안 계속되었다. 청소를 간만에 하면 알게 된다. 이렇게 방이 지저분했었나. 정우는 어느샌가 혼잣말을 자꾸 하고 있었다. 분명 혼잣말을 하는 습관은 없었다. 언젠가 요리를 하는 정우에게 현주가 사랑의 유형이 여섯 가지래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정우는 현주의 눈을 보고 너는 무슨 유형이야? 물었다. 현주는 일에서 여섯까지라고 말했다. 유형이 여러 개도 돼?라고 말하는 정우에게 현주는 나는 돼라고 말하며 테스트지를 건넸다. 이거 더 볶아야 돼라며 정우는 현주에게 집게를 건넸다. 테스트를 하면서 집중하는 정우가 습관처럼 입을 삐죽 내밀었다. 따라하지마라라고 말하는 정우를 보며 현주는 정우를 따라 하며 따라하지마라라고 놀렸다. 정우는 그날 하다 말은 테스트지가 청소기에 걸린 것을 확인했다. 청소기에 낀 테스트지는 쉽게 빠지지 않았고 그대로 있었다. 억지로 빼려고 해 봤자 일부만 찢어질 뿐이었다. 겨우 빼낸 테스트지가 결과 부분이 찢겼다. 정우는 그때 현주가 말한 사랑의 유형을 알지 못했다. 테스트를 하는 도중 요리가 다 되었다. 정우는 유형 2번인가 3번인가가 마음에 들었다. 순위 같은 느낌이 들어 펜을 놓고 밥을 퍼고 볶은 소세지 요리를 그릇에 부었다. 사랑의 유형을 하는 순위만큼 중요했던 그날의 일은 그야말로 한가득이었다. 그땐 뭐가 중요했는데, 그 일을 지금 떠올린다면 생각나지 않았다. 중요한 게 있었는데. 아무튼 오늘의 청소는 오늘 끝나야 했다. 청소기의 쓸모가 다 된 시간이 왔다. 이제는 화장실을 청소를 해야 한다. 세제를 가득 뿌리기 위해 베이킹소다와 세제를 섞었다. 화장실은 곧 세제 냄새로 가득 찼다. 청소를 하기 전 정우는 배가 고픔을 느꼈다. 왠지 맛있는 걸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무엇을? 한 번도 고민하지 않았던 고민이었다. 자신이 먼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는 것은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을 느꼈다. 미역국은 현주가 가장 좋아하는 국이었다. 육수는 멸치육수를 내었고 감칠맛이 났다. 마치 어렸을 때 엄마가 해 준 음식처럼. 즉석식품으로 파는 미역국만 먹다가 정성 들여 끓인 미역국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던 날, 끓이는 법을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입맛이 없거나 먹을 게 생각나지 않을 때, 먹어야 할 때 현주가 끓인 미역국을 생각했다. 하지만 정우가 할 수 있는 건 즉석식품의 미역국을 끓이는 일이었다. 밥을 대충 때우면서 화장실 청소를 해야겠다. 그리고 청소기의 먼지함을 비워야겠다는 혼잣말을 다시 했다. 5월이 되어 유난히 낮이 길어짐을 느끼는 순간, 문득 현주가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이별을 직감했던 순간, 현주는 갑자기 정우와 현주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말했던 것처럼, 그날도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정우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감정으로 말한 건지 알 것 같았다. 정우는 청소기의 먼지통을 분리하다 손이 미끄러졌다. 먼지통을 잡고자 공중에서 여러 번 헛손질을 했다. 결국 발 쪽으로 먼지함이 떨어지면서 수많은 먼지 잔해들이 쏟아졌다. 부유하는 먼지들이 온 방을 메웠다. 몇 번의 재채기, 콧물,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먼지가 눈처럼 느껴진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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