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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타는지성인 Apr 09. 2023

니체를 만나고 오는 길

언제부턴가 날씨가 좋은 날엔 산책을 하는 습관이 생겼다. 산책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만난 그날도 날씨가 좋았다. 나는 고민도 없이 간단한 복장으로 밖을 나섰다. 생각해 보면 그날은 이상했다. 이사 온 이후로 한 번도 고장이 없던 엘리베이터는 수리 중이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나온 김에 계단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다시 햇볕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 집에 들어가 봤자 유튜브나 볼 게 아닌가.

늘 가던 길 말고 다른 길로 산책길을 가고 싶었다.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생각을 하기에는 늦었다. 늘 가던 길엔 없는 횡단보도에서 나는 신호를 기다려야 했다. 이 길을 선택하지 않은 이유였다. 신호를 기다릴 필요 없는 길을 두고 굳이 돌아가기 싫었을 뿐이다. 누구도 재촉하지 않을 산책 가는 길인데, 신호가 나의 산책 가는 길을 방해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왠지 그날은 횡단보도에서의 사람들의 표정이 보였다. 평화로웠다. 

산책길로 들어서는 입구부터 기분 좋은 노래가 어디서엔가 흐르고 있었다. 그 노래에 맞춰 어떤 한 남자가 춤을 추고 있었다. 유튜버인 줄 알았으나 촬영장비는 없었다. 오직 춤만 출 뿐이었다. 그는 기분이 좋은 웃음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춤을 추라며 손짓했다. 사람들은 춤을 추는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나는 그 광경이 낯설어서 피식 웃고는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분명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놀라 뒤돌아보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A란 친구는 꿈꾼 거 아니냐고 말했지만 나는 아니라고 말하며 다음 이야기를 이어 말했다.     

내 이름을 부른 건 니체였다. 아무리 최근에 많이 피곤했어도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일했어도 현실과 꿈을 분간할 수 있는 정신이었다. 그 정도로 삶의 순간순간들을 인지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 내 이름을 부르며 내게 다가왔다. 두 번째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그가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뒷걸음치며 경계하며 말했다.

“좋아요.. 당신이 니체라는 걸 한눈에 알았어요. 지금은 현실이라는 것도 인정할게요. 대신.”

그는 아랑곳없이 세 번째 이름을 불렀다. 세 번째 이름이 불리자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공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다시 내게 나타나며 주위는 환해졌다.

“작년에 고민을 해결한 듯하더니, 또 나를 찾길래 내가 편한 장소로 초대했어. 내가 한 말을 풀이한 책도 읽었을 테고 그러면 됐을 텐데 뭐가 문제지?”

“뭐부터 말할지 모르겠어요. 모든 게 문제 투성이죠. 지금 겪고 있는 것들부터 해결하고 싶네요.”

“말해. 이런 시간을 가장 원하고 있었잖아. 그리고 한 명 더 초대할 건데 괜찮지? 물론 나는 너를 잘 아니까 싫다고 할 거 같아서 네가 좋아하는 사람으로 초대했어.”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초대했다니 그걸로 되었다. 나는 더 이상 의문을 가지지 않기로 했다. 낮이 오고, 밤이 오는 것처럼 자연현상대로 받아들여야 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누가 이곳에 초대 됐을지 기대되었다. 이왕이면 더 비현실적인 인물로. 낯선 경험에 점차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까지 말하자 A는 내 말이 어디까지 가는지 포기한 것 같아 보였다. 초반과는 달리 이제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더 말하는 게 의미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시작했던 말을 마치고 싶기 때문에 계속 이어나갔다.     

그러나 니체가 초대한 인물은 늦는다고 했다. 니체가 통화하기를 고속도로가 2차선인데 막혀서 지금 예정보다 훨씬 늦는다는 말이었다. 다시 한번 나는 여기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분명 고속도로는 현실의 이야기인데. 나는 끝내 그가 누군지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누군지만 말해달라고 말하지 않고 그는 말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작년 당신이 쓴 책은 과분해서, 당신이 한 말들을 풀이한 책들을 읽고 위안을 받았어요. 작가는 그런 말을 했어요. 니체가 말했다. 니체는 그러라고 했다. 니체는 그러니까 해야 한다. 이렇게 말이죠. 저는 그런 부분이 좋았어요. 지금 내 고민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는 것도 당신의 말에 믿었기 때문이에요. 이 믿음이 다른 종교와 같다고 말한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기독교도 불교도 결국 그 사람의 말을 믿는 거라면요. 저는 당신의 말속에 어쩌면 살아가는 힘이 되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예요”

나는 때마침 나온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고 말을 이었다. 자꾸만 비현실 속에서도 현실을 찾는 건 내가 아직 살아있다는 증거 같았다.

“그 모든 철학들이 위안은 되었는데 해결은 되지 않아요. 여전한 문제가 있다면 해결이 되어야 의미 있는 게 아닌가요? 해결이 되지 않는 문제에도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여기까지 말하고 나니 A가 배고프다고 말했다. 뭐라도 시켜 먹자고. 내 말에 관심은 없는 것 같지만 계속 들어주는 게 어딘가. 나는 치킨을 시켰다. 1시간 후면 올 것이다. 치킨이 오기 전까지는 계속 이어서 말할 수 있었다.

말을 마치자 니체는 큰 화면의 영상을 플레이했다. 어떤 알 수 없는 언어가 나오더니 페이드아웃되었고, 영화의 한 장면이 하나씩 나왔다. 빌리엘리엇이 아버지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장면, 멀티 우주 속 가장 실패한 인물인 에블린, 죽어가는 생에 모든 걸 바친 콜랭, 과거의 자신을 말없이 용서해 주는 엘튼존, 영원히 미제의 사건을 기억하며 살아갈 해준, 부끄러움을 시를 쓴 윤동주, 반복되는 일상 속 빈페이지에 시를 쓰는 패터슨, 철부지인줄만 알았지만 사실 누구보다 성숙한 무니였다.

“이 영화들 다 좋아하죠. 그런데 이건 그냥 지어낸 이야기일 뿐 저와는 관계없는 것 같아요.”

그러자 니체는 곧바로 다음 영상을 플레이했다. 이번에는 내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곧바로 페이드아웃 되었다. 내가 나왔다. 지금도 후회하고 있는 엄마와 싸우고 있는 나, 나는 실패라고 생각하는 나, 한 번도 열심히 산 적 없던 나, 과거의 나를 미워하는 나와, 영원히 미제의 고민으로 살아갈 나와,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글을 쓰는 내가 나왔다. 불만을 말하기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건가? 나는 니체가 잔인하다고 생각했다.      


A가 자기 비하적인 말을 하자 나를 너무 잘 안다며 그제야 흥미를 가졌다. 나는 그제야 저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를 수 있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시간은 일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은 그때와 다르게 말할 수 있고 행동할 수 있다. 하지만 알지 않는가. 마음만 먹었다고 해서 그것이 행동으로 나오지 않는다. 수 십 년간 각인된 DNA와 사고, 행동양식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뭘 말하는 건지는 알겠어요. 그런데 저는 저예요. 당신처럼 니체가 아니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저예요 무슨 말인지 알겠죠? 잠깐동안은 정신 차린다고 해도 완전히 바꿀 순 없어요. 모든 영화에서, 삶에서 증명했죠. 뭔가 있는 척 해결할 것 같았지만 당신은 틀렸어요. 글쎄요. 오늘부터는 당신을 별로라고 생각할 것 같네요.”

나는 실망했다. 작년의 위안이 모두 거짓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고 싶어졌다. 그러나 집에 가는 방법은 그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너는 내 책을 더 읽어야겠구나. 그렇게 완벽하게 알려줘도 안된다니 큰 문제군. 그리고 조금만 더 기다려. 이제 도착한다고 하니까. 인사만 하고 가.”

아직도 나는 그가 말했던 것들이 믿는지 의심이 되었다. 다시 이 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니체에게 당신의 철학은 해결엔 아무 쓸모없다고 말할 것이다.

진심이야?라고 묻는 다면 아직은 아니다. 그가 마지막에 말한 대로 아직도 니체가 말한 모든 것을 체득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드디어 집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더는 이곳이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빨리 집으로 다시 돌아가서 샤워를 하고 유튜브를 보고 싶었다.     


A가 이 이야기가 이제 끝나는 거냐고 말했다. 그렇다. 이 이야기의 끝이 왔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그와 있을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해했다. 마치 꿈을 꾸는 듯, 깨고 나면 아쉬워할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누구도 믿지 못할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산책을 하기 전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를 볼 수 없었다. 그가 누굴까 생각하면 나는 처음부터 니체가 그냥 내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잡아둔 이야기인 것만 같았다. 설령 누가 온다고 해도 그다지 놀랄 것 같지 않았다.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던가? 그래도 보고 왔다면 좋았을 뻔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산책길을 한 바퀴 돌고 다시 입구로 왔다. 여전히 기분 좋은 노래가 흘러나왔다. 춤을 추고 있었다. 이번엔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각자의 춤을 추고 있었다. 지구종말인가? 나는 피식 웃고 가던 길을 가려했다. 혹시나 내 이름을 부르면 어쩌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다행히 내 이름은 불리지 않았다. 나는 조금은 아쉬웠지만 무엇 때문에 아쉬웠는진 알 수 있었다. 나도 그들처럼 춤을 췄다면 어땠을까? 발걸음을 멈췄다.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춤추는 그들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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