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덕사에서 마주한, 그들의 애틋한 삶
여행을 즐기는 나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일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핫한 관광지나 짜릿한 액티비티가 아닌, 여행지에서 만난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흔적이라고 답할 수 있다. 오랜 세월 그곳을 지킨 자연경관이나 사람들이 살았던 장소들을 즐겨 찾는 이유는 그곳에서 풍겨나는 사람 냄새가 나에게 진정한 힐링을 주기 때문이다.
이번에 방문한 수덕사와 수덕여관도 내게는 아주 뜻깊은 여행지였다. 서울에서 가깝기도 하지만, 근대사의 흔적이 묻어있어 일 년에 한 번가량은 찾는 곳이다. 수덕여관은 수덕사 초입에 바로 자리하고 있어 두 곳을 함께 묶어 방문하기 좋다. 이번 방문 때 일주문이 대대적으로 공사 중이라 다소 어지러운 모양새였지만, 그럼에도 웅장함과 멋스러움은 여전했다.
수덕사 대웅전에서 바라보는 덕숭산 자락의 풍경도 기가 막히게 멋지지만, 나는 격동의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이야기에 더 집중하게 된다. 고암 이응노 화백과 그의 부인 박귀희 여사, 신여성의 시초인 나혜석, 그리고 수덕사로 출가한 신여성 김일엽 스님. 근대 현사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맞이한 이들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그늘이 아닌가 싶다.
한국 현대미술사의 거장인 이응노 화백은 어린 시절을 충남 홍성에서 보냈고, 나혜석이 수덕여관에 머물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에게 그림을 배우기 위해 한동안 머물렀던 인연이 있다. 그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조국으로부터 내쳐져 고향 땅을 그리워하다 프랑스에서 생을 마감했다. 특히,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몸을 추스른 곳이 바로 이곳 수덕여관이다. 여관 뒷마당에는 그가 제작한 문자 추상 암각화가 남아있어 그의 흔적을 다시금 살필 수 있다.
이응노 화백에게는 세 번의 결혼 생활이 있었는데, 특히 두 번째 부인인 박귀희 여사의 삶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응노 화백이 새로운 반려자를 만나 별거 중이었음에도,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옥에 갇혔을 때는 지극정성으로 옥바라지를 했고, 출소 후에는 수덕여관으로 모셔와 정성껏 보살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새로운 반려자가 있는 파리로 훌쩍 떠나버렸다. 오직 한 남자만을 바라보며 평생을 헌신했지만, 따뜻한 사랑 한 번 받지 못하고 일생을 외롭게 보냈다는 사실이 같은 여자로서 너무 가엽게 느껴진다. 여사가 돌아가신 후 그녀가 관리하던 수덕여관의 소유권은 수덕사로 이관되었다.
수덕여관과 인연이 있는 또 다른 인물은 바로 나혜석이다. 그녀는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강점기의 격동적인 시대를 살아간 신여성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다. 고정된 틀에 갇히지 않고 스스로 파격적인 삶을 살아냈지만, 그녀의 마지막은 무연고자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다. 그녀는 남성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하는 글을 남겼고, 그 파격적인 내용으로 인해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이혼 후에는 자식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당한 채 외로운 삶을 살다 영양실조로 길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그녀의 이유 있는 항변과 외침 덕분에 현재를 살고 있는 여성의 권위와 인권이 신장되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혜석과 함께 신여성으로 거론되는 김일엽 스님(본명 김원주)도 수덕사와 인연이 깊다. 몇 차례의 결혼과 이혼으로 피폐해진 속세의 삶을 청산하고 수덕사에서 승려로 출가하여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나갔다. 이렇듯 수덕사와 수덕여관에는 그 당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인물들이 머물다 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아름다운 풍경 이면에는 파란만장한 인물들의 인생 여정이 숨어있어, 격동의 시대를 유감없이 살아낸 그분들께 존경과 애틋한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다. 고요하고 고즈넉한 풍경 너머에 숨겨진 역사의 한 자락을 펼쳐볼 때면, 나도 모르는 깊은 울림이 새어 나온다.
그들의 발자취가 남은 이 공간에서, 나는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