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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자의 옷장 Oct 12. 2023

어느 늙은 테일러의 구원(7)

소설의 제7장

  패턴을 그리며 내가 의지할 곳은 다이어리에 적힌 몇 되지 않는 숫자들뿐이었다. 숫자들로 그려진 패턴은 나의 오랜 친구를 다른 관점에서 보게 만들었다. 그 건장했던 청년은 너무나도 작아져 있었다. 인간의 늙어감을, 친구의 늙어감을 숫자로 보고 인정해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철이 없던 시절 친구와의 많은 시간과 추억이 이 몇몇의 숫자로 치부되는 기분이었으나 그만큼 이 숫자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도 느껴졌다. 나의 연필 끝은 조금 더 뾰족해야했으며, 나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도 뾰족해야만 했다. 그것만이 내가 이 친구와 보낸 감사한 시간을 보상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나는 완성된 패턴을 꼼꼼히 확인했다. 오늘만큼 친구에 대해 고민해본 날은 아마 없을 듯싶을 정도였다. 다빈치가 인체를 고민했던 것과 같은 마음을 갖고 나는 친구의 몸을 정확하게 관철하고자 했다.

  “제발 이번만큼은 가장 완벽한 옷이 만들어지길...”

속죄였다. 이것이 구원인가 싶었다. 친구가 말한 그 구원이 이것이길 나는 내심 바랬나보다. 패턴을 자르는 용도의 가위를 꺼냈다. 내가 처음 일을 배울 때, 패턴을 자를 때 썼던 아주 오래된 가위이자, 사용한지도 아주 오래된 가위였다. 이 또한 나의 친구였다. 친구에게 친구를 부탁하는 일은 더 이상 나에게 일이 아니었다. 나는 과감하게 친구에게 몸을 맡기고 패턴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다 잘린 패턴지는 옆에 고이 모셔두고 재단대 위에 원단을 올렸다. 알 수 없는 감정적 동요가 일렁였다. 흥분도, 설렘도 아니었다. 오히려 공포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공포도 아니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재단대위에 올려놓는 것과 같은 건방지기 짝이 없는 그런, 아주 오만한 그런 감정에서의 공포였다. 나는 잠시 서 고민했다. 죽음을 각오하지만 생명을 주신 그 순간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고민해야만했다. 나는 이 공포에 가까운 감정을 해석하기 위해 성경책을 가지러 가 다시금 창세기를 폈다.


창 3:7

이에 그들이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내가 하는 행동은 인간이 죄를 알았을 때 첫 번째로 한 행동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읽고 바로 뒤에 오는 구절은 나에게 이 변호를 합리화시켜주었지만, 그 의미는 나는 알지 못했다. 그저 변호용 구절이었을 뿐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인간은 죄를 지었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는데 하나님은 죄를 지은 자들에게 무화과 옷이 아닌 가죽옷을 선물하셨다. 죄를 지어 쫓겨나는 데에도 제대로 된 옷을 지어 선물을 하셨다는 것은 나에게, 표면적으로 해석하며 ‘선물주신 것을 만드는 데 아무래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변호용이었지만, 오늘 내가 느낀 감정에서는 이를 다르게 해석하게 했다. 죄를 지어 죽음을 받았지만, ‘죽음으로 내 몸을 가리는 공생과 사랑, 죽음으로 다시금 시작되는 생명과 구원’ 오늘은 나에게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고민으로 인하여 이 구절이 이렇게 해석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죽옷과 비슷한 것도 만든 적이 없었다. 합리화의 수단으로만 해석한 내가 창피했다. 친구가 말한 것이 이 구원인지, 이 구원을 알게 하려 나를 교회에 다시 데리고 갔는지 나는 모를 일이다. 하지만 나에게 구원이 아닌 다른 구원을 나는 오늘 보았다. 그것은 친구가 나에게 물꼬를 터준 것에 의심은 없었다. 다시 나는 재단대로 돌아왔다. 재단대 위에 죽은 양처럼 곱게 놓인 이 원단에 감사를 느꼈다. 나는 곱게 원단을 반으로 접어 패턴을 그 위에 고정시킨 후 초크를 갈았다. 그리고 그 위로 조심스럽게 패턴을 덧그렸다. 구체화 되어있지 않던 원단은 점점 생명을 얻어가며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죽어있는 원단에 생명을 불어넣는 일은 역시나 항상 나에게 흥분되는 일이었다. 아담을 지으셨을 때 혹은 하와를 지으셨을 때 이러한 감정이었을까 싶다. 나는 싫었지만 오늘만큼은 모든 사고가 성경을 중심으로 흘러갔다. 원단위로 하얗게 그려진 패턴은 숭고하기 까지 하여 보였다. 새하얀 웨딩드레스처럼 하얗게 그려진 패턴을 나는 조심스레 가위질했다. 아담의 갈비뼈를 꺼내는 기분이었다. 원단도 헤링본(Herringbone)무늬인 것이 같은 뼈라고 생각하니 무언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허리랑 등 그리고 어깨가 아파왔다. 오랜만에 하는 집중은 생각보다 무리가 되었나보다. 그러나 이 일을 중간에 멈출 수 없었다. 나에게 온 이 감정과 생각이 사춘기의 그것과 같이 치부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는 움직였다. 바늘과 실을 잡아들고 재단대 위에 눌러 앉아 잘라진 원단과 여러 부자재들을 실로 엮기 시작했다. 바느질을 하며, 내가 진심으로 구하며 울며 엎어진, 고통을 거둬달라고 간구하던 그때 이후 처음으로 기도를 했다.

  “주님이시어. 부디 저의 목소리를 들어주시옵소서. 제 인생에 마지막이 될 이 옷을 제대로 만들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실로 오랜만에 한 기도는 꽤나 간절했다. 항상 마침표를 제대로 찍지 않았다는 나의 죄책감이 이 감정과 생각에 더불어 씻겨 내려가기를 원했다. 또 나는 나를 위하여 기도했다. 나는 이 속물적인 기도를 계속하여 되뇌며 몇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오랜 시간동안 바느질에 몰두했다. 라펠과 어깨의 경우 조금 더 손을 봐야 했지만 나는 얼른 가봉하여 몸통이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추게 했다. 어느새 늦어 재단대 위가 아닌 집은 어두웠기에 나는 방안에 전체적인 불을 켜고, 가봉된 몸통을 마네킹에 걸쳐놓고 세 발자국정도 떨어져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늘의 바느질은 평소와는 달랐기에 그러고 싶었다.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음에도 꽤나 좋아보였다. 옛날 같았으면 고질병과 같은 강박에 전혀 하지 않았을 행동이고 그렇게 보이지도 않았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좋아보였다. 내 기도가 들어졌다는 벅찬 감사가 잠시 스쳐갔다. 처음 재킷을 만들었을 때와 같이, 바보같이 마네킹만을 바라보다 다시금 벗겨 가봉을 뜯고 바느질을 이었다. 만듦새를 보니 친구가 집에 들어오는 날 1차 피팅을 꼭 보고 싶었기에 며칠만 무리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나는 기도가 들어졌다는 생각에 다시금 그 속물적인 기도 또한 계속 이어나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눈이 침침해져왔다. 나는 눌러앉았던 재단대에서 무거운 엉덩이를 곡소리를 내며 뗐다. 남은 시간은 5일 밖에는 없었지만 어렸을 적 남는 체력에 밤을 샜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몸이 버텨주질 않았다. 애석했다. 이제 와서 이런 기분이 들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죽음만을 간절히 바라는, 거의 70년간 바라온 그런 늙은이였다. 나는 괜스레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애꿎은 재킷만 만지작거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구두를 벗고 서스펜더를 풀고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무언가 마지막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이런 불안함은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자 했다. 나는 씻고 누웠지만 만들던 재킷이 눈앞에 아른거려 다시금 마네킹에 걸쳐진 재킷을 보러 일어났다. 그 앞에 앉아 달빛에 비친 재킷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사랑을 마주했을 때의 그런 감정도 일어났다. 고통을 피하려 도망친 곳에 오랜 시간이 지나 마주친 새로운 사랑이 있었다. 내가 여태 이것을 향해 사랑이라고 불렀던 것은 자기방어이자 고슴도치의 바늘과 같은 것이었나 보다. 오늘에야말로 옷이 주는 사랑을 처음 알았다.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이것은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나는 사랑을 만났을 때 태어난 것 같았고, 사랑이 떠났을 때 죽은 것과 같은 존재가 되었으며, 그 사이의 며칠만이 내가 이 오랜 시간 중 살아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그 사라짐과 고통에 대한 죽음의 갈망은 일종의 감정의 형태로 오랜 시간 나의 목을 죄어 왔으나, 이 오랜 시간과 고통 뒤에 다시금 비슷한 감정을 만난 것은 일종의 구원과도 같이 느껴졌다. 나는 오늘 여러 가지 구원의 종류를 몸으로 체감했다.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것은 아마 옷이 아닌 나일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늙은 나이에 웃기는 일이기는 했다. 나는 욥이 떠올랐다. 욥이 고통 뒤에 받은 큰 선물들 말이다. 그러나 나는 욥을 보며 그의 자식들의 죽음이 치유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했었다. 물론 나의 사랑도 그렇다. 치유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잊혀지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욥은 선물을 받았다. 나 또한 이 구원과도 같이 느껴지는 감정과 생각이 마치 욥이 마지막에 받은 거대한 선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욥기를 제대로 읽고 해석한 것도 아니고 믿음도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그래도 성경을 중심으로 사고가 돌아갔던 오늘은 이정도로만 나를 위로하며 생각하고 싶었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부정했음에도 사고가 성경을 중심으로 흘러가고 나도 모르게 기도가 나온 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가 해준 이야기들과 공부들 때문이었을까. 그것이 아니라면 고통에 몸부림치며 살려달라고 성경을 읽을 때였을까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이 옷의 주인이 친구이고 그 친구는 신실한 신자이며 그 친구가 나를 교회에 다시금 데려갔기 때문이었을까. 고민을 거듭했지만 결국에 그것은 아무쪼록 상관없었다. 그저 이런 나의 모습이 신기했을 뿐이었다. 계속되는 고민에 미완성인 재킷은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는 것이 부담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옛날과 같이 사랑이 마치 집착이 되어 다시금 멀어질까도 무서웠다. 그런 생각을 하니 공포가 몰려왔다. 이 공포에 옛날의 감정이 달빛에 드리우는 구름과 같이 나를 어둠으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나는 이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 도망치듯 방에서 뛰쳐나와 침대로 피신했다. 감정은 다시금 나의 목을 죄이려 시도했지만 다행히도 오늘의 피로는 나를 잠으로 먼저 인도해주었다.


  첫 날의 들뜸과 그 감정들을 가라앉히며 며칠 동안 나는 옷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했다. 소매와 트라우저 모두 수없이 만들었던 것들이지만 전부 새로웠다. 하지만 내가 만드는 방법을 바꾼 건 없었다. 마음가짐이라면 오히려 더 날카롭고 진지했다. 그럼에도 첫 날이 불러일으킨 감정과 사고가 만드는 이 신비로운 위화감은 처음과 달리 며칠간 나를 불안케 했다. 마치 조울증이나 정신착란이 온 것 같았지만, 나는 계속해서 이 옷의 본질을, 내가 여태 해온 본질을 계속해서 상기시키며 고민하고 분석해야했다. 그렇지 않다면 아름다움과 나에 취해 옷도 나도 망가지며 그 어떤 중심과 규율도 없을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첫 날의 고민과 감정은 구원과도 같아 보였지만 어느 샌가 족쇄마냥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것은 마치 일이 아닌 전쟁과 같았다. 나는 나와 수없이 싸워야했으며 이제는 많이 무뎌져 사라졌을 거라 믿었던 감정이 밀려올 때가 많아 더욱 전쟁 같았다. 무엇보다 냉정해야하는 것에 나밖에 존재하지 않은 듯 했다. 나는 나를 죽여야 했다. 과거와 달리 이제 내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흐릿해졌거나 책임이 덜해져서 그런 것일까 혹은 내가 너무 많아서 일까하는 자책이 이어졌다. 이러한 고민들이 옷에 나타날까 두렵기도 했지만 옷은 바느질을 더할수록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마치 다른 누군가 나의 손을 빌려 하는 듯 했다. 그렇기에 체념하고 피팅 전 마무리만 하자고 다짐하며 바느질에만 집중했다. 이미 내 옷이 아닌 것에 합리화를 하지 않으면 난 이 옷을 더 이상 만들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 남지 않은 마무리에 박차를 가하며 늦은 밤까지 다시 매진했다. 그렇게 마무리가 끝나고 나니 친구가 오기 이틀 전 날 밤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재킷을 마네킹에 걸어두고, 트라우저를 재단대 위에 곱게 펴놓았다. 이제 남은 일은 친구를 기다리는 것뿐이 없었다. 나는 또 넥타이를 풀며 씻을 준비를 하고자 방에서 나왔다.

띵동-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날 밤에 벨이 울렸다. 나는 깜짝 놀라 일단 문 앞에 다가서 말했다.

  “누구시죠?”

  “선생님 접니다. 급한 일이 있어 왔습니다.”

청년이었다. 청년이 나에게 급할 일은 없었다. 나는 문을 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인가. 일단 들어오게.”

  “네, 감사합니다.”

  “일단 앉지.”

청년은 어딘가 겁먹은 듯 앉았다.

  “따뜻한 물이라도 들겠나?”

  “아..! 네..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나는 물을 불에 올리고 물이 끓기를 기다렸다. 청년은 멍한 상태로 앉아있었다.

삐-삐-삐-

물이 다 끓어 나는 찬 물을 조금 섞어 청년에게 권했다.

  “따뜻한 물이라도 마시고 몸 좀 녹이게.”

  “감사합니다.”

  “그래. 이 늦은 시간에 괜히 온 것은 아닌 것 같고. 어쩐 일인가. 범죄를 저지른 것 마냥 긴장한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군. 천천히 몸 좀 녹이고 말해보게.”

청년은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잔만 만지작 거렸다.

  “이런 말을 전하게 되어 죄송합니다만...”

청년은 말을 끌었다. 나는 그의 표정을 보고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친구분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친구가 죽었다.



* 이 글 등 남자의 옷장으로 적히는 모든 글의 저작권 및 아이디어는 남자의 옷장 본인에게 있습니다.


썸네일 이미지 : Job Mocked by his Wife, c. 1625–1650, Musée départemental d'Art ancien et contemporain, Épinal, France. 출처: Wikipedia - Georges de La Tour


12OCT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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