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도상점가, 변신의 조건』여덟번째 글
지하도상가의 위기를 단순히 “경기 침체”나 “상인 역량 부족”으로 해석하는 시각은 피상적이다.
문제의 본질은 훨씬 깊다.
지하도상가는 태생적으로 도시 교통체계와 상업 공간의 결합물이었고, 시대가 변하면서 도시 구조와 소비 문화가 달라졌는데, 그 변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첫째, 보행자 중심 도시구조 전환이 결정적 요인이다.
1970~80년대 지하도상가는 차량 중심의 도심 교통 환경 속에서 보행자의 안전한 이동을 위한 대안이었다. 도로 위로는 차량이 질주했고, 사람들은 길을 건너기 위해 지하도를 이용해야 했다.
상권은 자연스럽게 ‘통행’과 ‘소비’를 결합시켰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는 보행자 중심으로 정책 방향을 바꿨다.
넓어진 횡단보도, 걷기 좋은 거리 조성, 도시재생을 통한 가로환경 개선은 지상 공간의 매력을 극대화했다.
결과적으로 지하도는 더 이상 ‘필수 동선’이 아닌 ‘선택적 통로’로 전락했고, 이는 곧 지하도상가의 구조적 한계를 드러냈다.
둘째, 지상 상권의 진화와 지하의 정체다.
동대문 상권을 보라. 과거에는 전국 단위의 패션 도매·소매 중심지였지만, 지금은 온라인 쇼핑몰과 글로벌 브랜드 확산으로 예전 같은 위세를 잃었다.
그럼에도 지상 공간은 여전히 빠르게 진화한다.
로드숍, 글로벌 SPA, 카페, 팝업스토어가 끊임없이 새 얼굴을 내밀며 소비자와 호흡한다.
반면 지하는 낡은 시설과 반복되는 업종에 머물러, 같은 공간임에도 ‘발전 속도’에서 지상에 완전히 밀린다.
셋째, 복합몰과 핫플레이스의 압도적 흡인력이다.
스타필드, 더현대 서울 같은 대형 복합몰은 쇼핑·문화·여가를 통합해 고객의 체류 시간을 극대화한다.
성수동, 연남동, 망원동 같은 신흥 핫플레이스는 MZ세대가 선호하는 감각적 경험과 로컬리티를 제공한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물건을 사기보다 ‘어디서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중시한다.
지하도상가는 이런 경험적 소비의 전환을 흡수하지 못했다.
단순 점포 나열 구조로는 소비자의 선택지를 빼앗아올 수 없다.
넷째, 포지셔닝 실패다.
지하도상가는 저가 의류·액세서리·잡화에 의존했으나, 이 시장은 이미 온라인 쇼핑몰이 장악했다.
프리미엄 브랜드로 갈 수도 없고, 로컬리티 기반 콘텐츠를 담을 수도 없는 어정쩡한 위치에 놓였다.
다시 말해 “싸게 팔자니 온라인이 더 싸고, 차별화하려니 공간 이미지가 뒷받침되지 않는다.”
이 모순이 경쟁력 상실의 본질이다.
다섯째, 운영·관리 구조의 한계다.
복합몰은 전문 운영사가 마케팅·브랜딩·테넌트 믹스를 통합적으로 관리한다.
반면 지하도상가는 지자체, 위탁 운영사, 상인회가 분절적으로 운영한다.
전략적 기획과 브랜딩이 부족하니, 개별 점포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체 공간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어렵다. 결국 관리 역량의 격차가 경쟁력의 격차로 이어진다.
결국 지하도상가는 보행자 동선 변화 → 지상 상권 진화 → 복합몰·핫플레이스 성장 → 포지셔닝 실패 → 운영 한계라는 다섯 가지 구조적 요인 앞에 서 있다.
단순한 노후화나 일시적 불황이 아닌, 도시 구조와 소비 트렌드의 근본적 변화가 문제의 본질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중요한 인사이트가 나온다.
경쟁에서 밀려난 구조적 원인을 직시하는 것은 곧 새로운 변신의 조건을 찾는 출발점이 된다.
지하도상가는 더 이상 ‘저렴한 쇼핑 공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대신 보행자 중심 도시 속에서 지상과 다른 경험을 제공해야 한다.
지상에서 얻을 수 없는 독창적 체험, 생활밀착형 서비스, 로컬 창작자와의 협업 같은 차별화가 필요하다.
주변 상권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이유는 분명하다.
문제는 그 이유를 어떻게 뒤집어 기회로 만들 것이냐에 달려 있다.
지하도상가의 재도약은 “지상과 경쟁하지 않고, 지상과 다르게”라는 원칙에서 시작해야 한다.
- 멘토 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