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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Jul 28. 2021

오뎅 손과 봉숭아 물

: 가끔, 봉숭아 물을 들인 빨간 손톱으로 첫눈을 맞이합니다.

 내 손가락은 별명을 가지고 있다.

 내 별명과 별개로, 손가락의 별명은 '오뎅'이다. 별명은 보통 이름에서 시작되거나, 외모의 어떤 특징에서 탄생한다. 짐작하듯이 '오뎅 손'은 오뎅을 닮은 내 손가락의 생김새에서 비롯되었다.

 '오뎅(おでん)'의 원래 뜻은 어묵과, 곤약, 유부와 야채를 해산물과 함께 뜨거운 국물에 넣고 끓여 먹는 일본식 나베요리를 말하지만, 내 손가락에 붙여진 '오뎅'은 그냥 '어묵'의 일본말이다. 그것도 사각어묵이 아닌, 꼬치에 끼우는 길쭉하고 통통한 어묵이다. 손가락이 길고 통통해서 생겨난 별명인데, 아주 친한 친구들만 부른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관계가 틀어질 우려가 있다. 


 내 오뎅 손은 어릴 적부터 짧은 손톱을 강요받았다.

 그 시작은 피아노 학원이었다. 피아노 학원 선생님은 자세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 피아노를 칠 때 건반에 닿아야 할 부분은 손가락 지문이 아닌, 손톱 아래 도톰한 살이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손톱이 조금만 길어도 혼이 났다. 다음날은 어김없이 손톱을 자르고 가야 했다. 선생님 말을 잘 듣는 소심한 아이였고, 딱딱한 피아노 건반에 손톱이 부딪히는 느낌도 좋진 않아서, 그때부터 손톱을 짧게 자르기 시작했다.

 내 짧은 손톱의 명분은 피아노 학원에서 주산 학원으로 이어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세 살 위 언니가 컴퓨터 학원을 다니는 동안, 나는 주산 학원을 다녔더랬다. 1원이요! 2원이요! 를 하던 시절에야 한 손가락으로도 주판알을 튕겼다지만, 3십9만 5천6백7십8원이요! 는 얘기가 달랐다. 주판알을 정확하고 재빠르게 옮기려면 손가락 끝의 예민한 감각이 필요했다. 긴 손톱은 그야말로 방해꾼이었다.


 혹, 주산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

 주산은 주판을 사용해 계산하는 것을 말한다. 주판의 생김새는 아래 그림과 같다. 윗 칸의 1알은 숫자 5에 해당하고, 아래칸의 1알은 숫자 1에 해당한다. 알을 이리저리 옮기며 셈을 한다.


 성인이 되어서는 그다지 예쁘지 않은 손 대신, 단정한 손이 되기를 선택했다. 오뎅 손이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도록 손톱을 짧게 잘랐다. 당연히 바를 손톱이 없으니 매니큐어도 관심 밖이었다. 이후로도 기타를 배우면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점점 짧은 손톱은 나에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렇게 짧게 자르면 아프지 않냐'는 말을 들어면서도 손톱깎기를 최대한 손톱 깊숙이 갖다 댔다.


 그런 오뎅 손이 유일하게 손톱을 기르는 시기가 있다. 바로 첫눈을 기다리는 때이다.

 손톱 끝에 아슬아슬하게 남은 봉숭아 물을 첫눈이 올 때까지 사수하려면, 손톱이 길어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야 했다. 여름에 정성껏 들인 봉숭아 물에 첫눈을 맞히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미 결혼을 한 몸이라 첫사랑이 이루어지면 무척 곤란해질텐데도, 첫사랑이 누구였는지 기억도 못하면서, 일단 손톱 끝에 남아 있는 봉숭아 물을 보면 첫눈이 올 때까지 남겨두고 싶어 진다.


  운이 좋으면 종종 봉숭아 물을 들인 빨간 손톱으로 첫눈을 맞는다. 그런다고 특별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여름이 오면 또다시 봉숭아 물을 들인다. 하얀색, 분홍색, 자주색, 빛깔 별로 꽃잎을 딴다. 잎도 넣어야 물이 곱게 든다는 근거 없는 이야기 때문에 녹색 잎도 몇 개 딴다. 오목한 그릇에 담고서, 백반도 아주 조금 넣는다. 백반을 많이 넣으면 색이 까맣게 들어 망하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그런 다음, 그것들을 열심히 짓이긴다. 미리 손톱을 감쌀 비닐과 묶을 것들을 사이즈에 맞게 잘라서 준비해둔다. 짓이겨 놓은 것을 젓가락으로 조금 떼어 손톱 위에 올린다. 비닐로 감싸고 손가락에서 빠지지 않도록 단단히 묶으면, 벌써 손톱 주변으로 빨간 물이 새어 나온다. 그렇게 하룻밤을 꼬박 싸매고 있어야 손톱에 봉숭아 물이 밴다. 그리고 꼭 그렇게 열 손가락을 싸맨 밤에는 간지러운 곳도 많고, 손 쓸 일이 많아진다.  


 작년에 들인 봉숭아 물은 첫눈을 무사히 지났다. 그리고 엄지발가락의 경우, 해를 지나 여름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남아 있다. 마치 볼펜으로 선을 그어놓은 듯 간신히 남아 있긴 하지만, 곧 이별을 하게 될 것 같다. 올 첫눈을 기다릴 새 봉숭아 물을 곧 다시 들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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