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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막내작가 Jul 27. 2021

삶을 쓰고, 문장을 산다.

: 쓰고, 고치고, 지우고, 정답이 없다. 문장이 그렇다. 삶이 그렇다.

 나는 매일 문장으로 출근을 하고, 문장으로부터 퇴근을 한다. 

 물리적 출퇴근과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퇴직 이후 매일 출퇴근하듯이 문장에서 시작해 문장으로 끝나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문장을 쓰고, 고치고, 다시 쓰고, 또 고친다. 내 문장도 어찌하지 못하는 주제에 어쩌다 보니, 이제 남이 써놓은 문장까지 붙들고 씨름하는 중이다. 다른 이의 문장에 월권을 행사하는 기분이다.

 내 문장을 고치는 일은 새로운 눈을 장착해야만 가능한 일이라 쉽지 않고, 남이 쓴 문장을 고치는 일은 글쓴이의 의도를 1부터 100까지 모두 알 수 없으니 쉽지 않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아침 내내 제가 쓴 시의 교정쇄를 검토했습니다. 그리고 쉼표 하나를 뺐지요. 오후에는 무엇을 했느냐고요? 흠, 뺏던 쉼표를 도로 넣었지요."

 깊은 공감에 헛웃음이 나왔다.

 문장 하나를 몇 시간째 붙잡고 앉아 쉼표 하나, 조사 한 글자, 수식어를 썼다 지웠다 바꾸기를 반복한다. 이 바보 같은 일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쓰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런 이상한 짓을 나만 하는 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아직 세상에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내 이야기는 없지만, 노트북 속에서 열심히 단장 중인 문장들이 있다.

 그것들을 매일 마주하고 있었더니, 문장의 또 다른 모습이 보인다. 자주 봐서인지, 가까이 봐서인지는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문장이 삶처럼 보인다. 보면 볼수록 그 둘은 참 닮았고, 또 다르다.


 내 경험에 의하면, 문장은 다듬을수록 좋아진다. 가끔은 돌고 돌아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손을 대면 댈수록 더 정갈해진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빗듯, 어질러진 책상 위를 깔끔하게 청소하듯, 문장을 수정하면서 느끼는 쾌감이 있다. 변태는 아니다.

 삶도 문장처럼 쓱쓱 지우고, 빼고, 바꿀 수 있으면 좋겠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이곳저곳을 키보드 위 열 손가락으로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면 좋겠다. 하지만 아쉽게도 삶에는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다.

 이미 내뱉어버린 말들이 그렇다.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행동들도 그렇다. 어떤 말은 누군가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되었고, 어떤 행동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았다. 쥐구멍으로 숨고 싶던 순간들, 조금 더 잘하고 싶던 것들, 어디 한 두 가지일까. 삶의 한 순간으로 돌아가, 집어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통째로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살아내고 싶은 그것들은, 종이 위에 볼펜으로 쓴 문장과도 같아서 지울 수도 수정할 수도 없다.


 문장 다듬기의 시작은 불필요한 부분을 빼는 것이다. 그런데 불필요한 부분을 찾기가 생각보다 어렵다. 더구나 내가 쓴 글을 내 눈으로 찾아내기란, 매직아이를 보는 것과 비슷하다.

 중학교 시절 매직아이가 유행했다. 맨눈으로 보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초점을 잘(뭐라 설명할 수 없다, 그냥 알아서 잘) 맞추면 그림 안에 어떤 입체적인 모양이 보인다. 내 경우에는 일단 매직아이를 눈앞에 최대한 가까이 대고서, 두 눈을 중앙으로 모았다. 일명 사팔눈을 하고서 그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새로운 시야가 열린다. 초점을 맞추는 이 어려운 단계를 넘어서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인다. 

 문장 역시 불필요한 부분을 찾아내는 어려운 단계를 넘어서면, 문장은 훨씬 간결해지고 의미 전달이 분명해진다. 다이어트에 성공한 몸처럼 가뿐해진다. 내 몸에 붙은 살 1kg을 빼는 일에도 많은 땀을 흘린다. 식욕 하나 떼어내기도 힘든데, 삶에는 떼어내야 할 것들이 더 많다. 고집, 욕심, 오해, 습관, 나쁜 것들은 떼어내고 돌아서면 다시 붙어 있다. '빼기'는 어느 곳에서나 난이도가 높은 문제인 것 같다.

 특히, 있어 보이려고 갖다 붙인 표현들은 문장을 지저분하게 만든다. 몸에는 치렁치렁 장신구를 매달고, 마음에는 허영심을 매단다. 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뭘 자꾸 갖다 붙여서 삶이 이래저래 무거워진다.


 문장과 문장이 만날 때 필요한 것은 접속 부사다. 그래서, 그리고, 그러나, 하지만, 또한, 한편으로, 그럼에도 등 뜻과 쓰임새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접속부사를 잘못 쓰면, 문장이 망한다. 문맥상 앞뒤가 맞지 않으니 우스운 꼴이 된다. 우스워지는 건 문장이나 삶이나 매한가지다. '그래서'가 어울릴 타이밍에 '하지만'을 들고 갔다가 낭패를 본 경우가 있다. '또한'을 들고 다가가야 할 누군가에게 '그럼에도'를 들고 다가갔다가 어긋나 버린 관계가 있다. 주제 파악 못지않게 문장과 삶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앞뒤 상황 파악인 것 같다.


 긴 문장은 문장을 다 읽기 전까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한 글자 한 글자 읽어나가는 동안에 글쓴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짐작하며 읽어나간다. 두괄식이면 참 좋겠는데, 미괄식인 경우는 의미를 찾아 긴 문장을 읽어나가는 동안 가끔은 길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삶은 우리에게 그 끝을 보여주지 않기에,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에 수없이 많은 의문 사이를 어림짐작하며 걸어간다. 긴 문장을 한 단어 한 구절씩 읽어나가듯 삶을 살다 보면, 그 끝에 어떤 이야기가 완성될지 궁금해진다. 삶이 내게 궁극적으로 하려는 이야기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삶의 맥을 파악하고 있다면, 꾸역꾸역 살아내는 오늘이 조금은 더 가벼워지지 않을까 상상만 해본다.


 문장을 다듬는 일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끝이 없다. 도저히 더는 들여다볼 수 없다고, 두 손 두 발을 들 때까지 들여다보아야 멈춰지는 일이다. 죽기 직전까지 다듬고 수정해야 하는 삶임에도 마음대로 수정할 수 없는 삶이라, 답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어제는 덧붙이고, 오늘은 빼고, 내일은 다시 덧붙일지도 모르는 삶을 오늘도 정답 없이 일단 살아본다.  


 삶에는 더 이상 수정할 수 없는 문장들이 있지만, 그럼에도 계속 써 나가야 하는 삶을 문장에 빗대어 살아본다. 문장을 쓰듯이 삶을 살고, 삶을 살듯이 문장을 쓴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그냥 일단 해보는 거다. 문장은 일단 쓰고 보면 되고, 삶은 일단 살고 보면 된다. 고칠 수 있는 문장은 고치고, 고칠 수 없는 문장은 나를 다듬는 좋은 예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정답은 없으니까.


 매직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 그것이 보이지 않던 나는 거짓말을 했다.

 "어! 보인다! 보인다! 나도 보인다!"

 친구가 물었다.

 "뭐가 보이는데? 말해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종종 누군가 내게 묻는다.

 "글은 잘 써지고 있어?"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한다.

 "응, 열심히 쓰고 있어."

 그러고 나서 열심히 쓰려고 나름 애를 써본다.


매직아이다. 무엇이 보이는가? 정답: 원뿔 모양의 입체도형이 그림 한가운데 보인다. (출처: 나무 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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