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모든 이유는 너를 향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좋아하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햇빛을 받으며 빛나는 머리칼을 네가 가지고 있어서일까, 호박색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걸 너는 알까, 너의 걸음걸이마다 꽃이 활짝 피어나는 건 기분 탓일까, 사납기로 유명한 길고양이를 네가 쓰다듬으면 도망가지 않는 것도, 모든 건 네가 주인공이기 때문이 아닐까. 난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주인공이 너라면 난 너를 바라볼 수 있는 엑스트라 1이어도 행복할 것 같다고, 바보 같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나의 모든 이유는 너를 향하고 있었다.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물들었을 때 네가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 옆에서 너를 지켜보던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아도 나는 항상 너를 걱정했다. 너는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다. 아침에 일어나는 날이 없었고 모두가 잠든 밤에 활동을 시작했다. 하루 종일 굶었던 배를 채우고 옥상으로 산책하러 다녔다. 넌 내가 밤에 자는 줄 알았겠지만, 난 너를 따라 아침에 자고 밤에 일어났다. 그리고 밤에는 너를 방해하지 않으려 자는 척했다. 너의 구둣발 소리와 한숨을 듣고 생사를 확인했다. 너에게 거슬리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너는 매번 나를 무시했다. 내가 너를 빤히 바라보고 있어서일까? 내가 너를 부담스럽게 했기 때문일까? 나는 너에게 귀찮은 존재인 걸까? 너는 나를 마치 집에 없는 사람처럼 대했다. 내가 집에서 뭘 하고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난 너에게 관심받기도 무서워서 차라리 숨는 편을 선택했다. 혹여나 집에서 마주치면 너를 피했다. 네가 나를 피하기 전에 내가 먼저 행동했다.
난 나의 삶을 너에게 맞춰갔다. 네가 자는데 불편하지 않게 집의 모든 커튼을 내리고, 시간이 지나고 일어났을 때 네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미리 준비했다. 비가 내렸던 날이면 옥상에 올라가 물기를 닦아내고, 혹시나 네가 저 밑으로 떨어지지 않게 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네가 방에서 나오지 않는 동안 집에 도배되어 있던 복잡한 무늬의 벽지를 새로 갈았다. 이제 우리 집은 온통 흰색이 되었다. 너와 나의 세상엔 흑백만 가득했다. 색이라곤 식탁 위에 놓여 있는 과일 바구니 안의 사과뿐이었다. 모든 게 백과 흑으로 이루어진 공간에서 덩그러니 빨강이 굴러다녔다.
곧 날은 어두워지고 넌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걸어왔다. 적막을 깨고 네가 물을 마시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따라 물이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난 방으로 들어가려 의자에서 일어났다.
...
그리고 내가 본 건 피를 토하며 쓰러진 너의 모습이었다. 빨간 피가, 사과보다 더 빨간 피가 흰색 바닥에 흐른다. 정신이 없었다. 난 너를 흔들어 깨우고, 물로 씻기고, 약을 먹이고, 피를 닦았다. 하얀색 손수건이 빨갛게 물들었다. 나는 너에게 괜찮은지 한마디도 물어보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내가 너를 사랑할수록 너는 더 망가져 갔다. 나에겐 선택권이 없다. 넌 나를 바라지 않고 난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 집을 떠나기로 했다. 너를 혼자 남겨두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네가 힘들어하는 건 도저히 볼 수가 없었다. 네가 잠드는 아침에 난 집을 나섰다. 어차피 네가 일어날 리 없는 시간에 너를 보고 싶어 잠시 뒤돌아 집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던 순간, 네가 방에서 나왔다. 반쯤 뜬 눈으로 두리번거렸다. 나는 너를 너무 보고 싶어서 만든 허상일 뿐이라고 착각했다. 내가 없어진 걸 알고 일어난 걸까? 아니면 혼자가 되었다고 기뻐할까? 너는 매일 아침 무슨 꿈을 꾸는 걸까? 생각은 끊임없이 자라났고 난 겨우 생각의 가지를 끊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정말로 발걸음을 옮겼다. 난 아무도 오지 않는 폐건물 옥상에 서서 밑을 내려다봤다. 아주 예전에 지금 내가 서있는 이곳에서 너를 만났다. 너는 나를 너에게서 떼어냈다. 그렇게 떼어진 너의 슬픔은 너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네가 슬픔을 느끼지 않았으면 했다. 슬픔과 분리된 너는 홀가분했었던가?
인기척이 들린 쪽을 바라보니 네가 서 있었다. 결국 넌 다시 나에게로 왔다. 너는 안도와 불안이 담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네가 점점 나에게로 다가오는 순간 나는 너와 작별했다. 동시에 너는 다시 슬픔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혹여나 네가 나를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마음속으로 삼키고 난 다시 너의 부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