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서 한이를 지우기로 결정했다
한이의 장례식에서 해야 할 일은 없었다. 고인을 떠나보내는 꽃마저도 만지지 않았다. 하얀 꽃을 만진다면 붉게 물들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육개장도 먹지 않았다. 내 하얀 셔츠에 흘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난 그저 환하게 웃고 있는 한이의 사진만 보고 장례식장을 빠져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가장 친한 친구가 죽었는데 정도 없이 그냥 가냐며 꾸짖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사연을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 안타까운 사고로 치부된 한이의 죽음은 장난 같았다. 나보다 오래 살 거라며 떠벌떠벌 말을 늘어놓았던 한이는 나보다 먼저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믿고 싶지 않았다. 다음에는 믿을 수 없는 사실에 화가 났고, 또 다음에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 인생에서 한이를 지우기로 결정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다. 조용하고 소심한 탓에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했던 나에게 다가온 사람은 한이 뿐이었다. 우연히 옆자리였던 한이는 마치 나를 오랜만에 만난 친구인 것처럼 굴었다. 겉모습 말곤 볼 게 없었던 순간에 왜 하필 나를 골랐을까. 난 한이의 순수한 눈망울에 홀렸다. 그래서 더욱 믿고 의지했는지도 모르겠다. 짧은 시간 내에 많은 정보를 공유한 우리는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는 남에게 너무 많은 정보를 준 것에 대해 후회하고 후회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 사람은 괜찮겠지, 비밀을 잘 지키겠지, 성격도 좋아 보이던데. 자기합리화하며 내 머릿속의 한이는 배려심 많고 인성 좋은,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상상 속의 한이와 현실의 한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몇 년간 생일 파티를 해 본 적이 없었지만, 한이는 그날을 꼭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 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만나서 길에 차곡차곡 퍼즐처럼 맞춰져 있는 상가를 돌아다녔다. 상가의 1층에는 무인 기념품샵이 있었다. 귀여운 동물 인형들과 아기자기한 삔 같은 것들이 바로 보였다. 그때 한이는 머리와 목에 리본을 달고 있는 토끼 인형들을 가리켰다. 우리 이거 맞출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 친구들과 물건을 맞춘 애들이 부러웠기 때문에 이걸 가방에 달고 다닌다면 나도 친구가 있다는 걸 티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치한 생각이었다. 분홍색과 파란색 리본을 하나씩 고르고 결제를 하려 했지만 한이는 나더러 돈이 부족하다고 했다. 이곳은 결제를 하지 않으면 나가지 못하는 곳이었다. 괜히 웃음 지으며 돈이 넉넉한 내가 사주겠다고 했다. 내심 돈이 아까웠다.
졸업을 하고 동거를 시작했다. 한이는 집에서 독립을 해야 하는데 혼자 살긴 무섭다며 나를 끌어들였다. 집은 자기가 사줄 거라며 말이다. 그렇게 동거를 시작하고 몇 달이 지나니 한이는 나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해왔다. 집도 내가 사고 이제껏 생활비도 내가 다 해줬는데 너는 하는 게 없지 않냐고 날 구박하는 말로 시작했다. 한이가 하는 말은 곧이곧대로 믿었기 때문에 난 멍청하게도 설득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 통장에 있던 돈은 급격히 줄어들었다. 평소에 물욕도 없고 사치도 즐기지 않았던 터라 돈이 한 번에 많이 빠져나가는 게 불안했다. 그 옆엔 어차피 돈은 다시 벌면 된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하는 한이가 있었다.
한이와 내가 동거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애인의 집에서 몇 밤 자고 올 거라는 한이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한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한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나와 달랐다. 모두 그녀를 그리워했고 억울하게 죽은 여자라는 타이틀을 만들어냈다. 한이의 소식을 접하고 나는 가장 먼저 집에서 한이의 흔적을 없앴다. 한이가 두고 간 물건이 많지는 않았다. 나에게 준 편지나 싸구려 간식만 남아 있었을 뿐이다. 난 스스로를 다독여야 했다. 한이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며 매 시간마다 주문처럼 외웠다. 놀랍게도 점점 한이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이가 없으니 세상이 더 넓어 보였다. 그동안 우리라는 말에 갇혀 살았던 시간이 다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난 마음을 정리하고 한이의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나더러 한이를 왜 이렇게 싫어하는지 물어본다면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한이는 나에게 폭언을 하거나 물리적인 피해를 입히지 않았다. 매번 나를 위해 좋은 말을 해주고 가장 아끼는 친구처럼 대해줬다. 난 한이에게 피해를 받은 게 없었다. 한이에게 정이 사라져 버린 이유는 감히 나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더 잘해줄걸, 붙잡을걸, 널 좋은 사람으로 만들 수 있었는데. 하지만 죄책감은 남아있지 않았다. 한이의 세계에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은 한이 뿐인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