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야옹 Mar 18. 2024

건포도 시나몬 식빵에 대하여

일전에 베이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몬트리올의 베이글의 추억이 너무도 멋졌기 때문에 다시는 그 베이글 가게를 가지 않을 작정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좋은 기억이라면 꼭 다시 가고 싶은 맛집일 텐데 왜 두 번 다시는 가지 않겠다는 말이 나왔는지 해명을 해 보고자 한다.


어떤 일들은 시기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근사하고 아름답다. 몬트리올의 완벽한 베이글에 감탄하며 12월 말의 추위를 뚫고 걷던 나는 이십 대 초반이었고, 싱글이었고, 아직 세상에 얼마나 맛있는 게 많은지를 잘 모르는 애송이였다. 몬트리올 베이글은 어쩌면 지금도 완벽한 베이글의 표본일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와 시너지가 생겨나서 베이글의 이데아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굳이 그 아름다웠던 기억을 현실의 영역으로 가져오고 싶지 않다.


몬트리올을 방문했던 그 시기에 나는 미국에 살고 있었는데, 지금은 믿을 없는 이야기이지만 때의 한국은 빵의 불모지였다. 지금처럼 맛있는 빵이 사방에서 사람을 유혹하고 있지 않았다. 프랜차이즈 매장의 빵도 퀄리티가 높지 않았고 편의점 빵은 말할 것도 없었다. 맛있는 식빵 같은 건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다. 그런 시기에 미국으로 건너간 나는 마트에서 운명적 만남을 이루었으니, 건포도가 콕콕 박히고 시나몬 스월이 들어간 얇은 마트 식빵이었다.


나는 건포도 시나몬 식빵과 즉시 사랑에 빠졌다. 매일 아침 그 식빵을 먹었는데도 물리지 않았다. 구워 먹어도 맛있었고 그냥 먹어도 맛있었다. 우유에 적셔 먹어도 맛있었고 커피에 적셔 먹어도 맛있었고 아침에 먹어도 점심에 먹어도 저녁에 먹어도 좋았다. 일 년을 미국에 살면서 그 식빵이 나와 함께하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다. 어떤 날은 아침 점심 저녁 세 끼를 전부 다 그 식빵으로 먹었는데, 때웠다는 표현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호사스러운 경험일 정도였다. 귀국을 하면서 많은 것들이 아쉬웠고 그리웠지만 미국 음식 중 가장 그리울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그 건포도 시나몬 식빵이었다. 나는 왜 그 식빵을 잔뜩 사서 귀국하지 않았을까 후회한 날도 많았으니 더 말해 무엇하리오.


그런데 건포도 시나몬 식빵과 나의 인연은 생각보다 끈질겼다.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 출장 차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는데, 숙소 근처의 마트에 물과 음료를 사러 갔다가 나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지고 말았다. 십오 년도 더 전에 먹었던 그 건포도 시나몬 식빵이 포장지 디자인도 바뀌지 않은 채로 매대에서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는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매대 앞에서 빵을 부여잡고 울었습니다... 라고 하면 거짓말이지만, 나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 정도는 질렀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두 봉을 집었다. 하나는 체류 기간 중 먹고, 하나는 집에 가져갈 생각이었다. 내 이십 대 초반 시절 가장 사랑하던 빵이 아닌가. 그런데 왜 결국은 한 봉만 결제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시간 여행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미래의 내가 개입하여 일으킨 기적이라고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비치되어 있던 토스터에 건포도 식빵을 넣고 구웠다. 원래 얇은 식빵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기억보다 얇았고, 기억보다 퍼석퍼석했다. 경쾌한 알림 소리와 함께 나온 식빵은 훌륭한 갈색이었고 기억보다 공산품스러운 냄새가 났다.


그리고 대망의 입 안에서의 재회.


드라마 속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속눈썹에 눈물을 글썽이지는 않았지만, 그 못지않게 참담한 심정으로 생각했다.


우리, 다시 만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 텐데.


그 사이에 나는 너무도 맛있는 빵을 많이 만나 버렸고, 건포도 시나몬 식빵은 변한 구석이 없었다. 돌이켜보니 첫사랑이었던 대학교 때의 베이시스트를 지금 다시 만난다면 그 때만큼 풋풋한 기쁨을 느낄 수 없을 게 분명한 것처럼 나는 더 이상 그 식빵을 사랑할 수가 없었다. 너무 얇았고, 너무 건조했고, 십오 년 전에는 기쁨이었던 맛들이 이제는 인위적이고 얄팍하게만 느껴졌다. 원래 계획대로 두 봉을 샀더라면 난감할 뻔했다. 이전에는 하루 종일 이 빵을 식사로 삼아도 물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남은 빵을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되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우리의 재회는 아름답지 못했다. 건포도 시나몬 식빵의 잘못은 아니었다. 변한 건 나였다. 나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간신히 식빵 한 장을 먹어치웠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십여 장 이상의 그 나머지를 어떻게 처분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버렸을까? 꾸역꾸역 먹었을까? 마치 일부러 지워 버린 것처럼 머리가 새하얗다.


그러니 나는 몬트리올의 베이글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어떤 이별은 재회보다 아름답다.

                    

이전 02화 열아홉의 영화관에 대하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