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presso CORE 롱블랙
예전엔 회사에서의 성장이 곧 나의 성장이라고 생각했다. 더 다양한 (어쩌면 더 많은) 일들을 하고, 그만큼의 다양한 경험들이 쌓으면 내가 성장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었었다. 그렇게 한 단계씩 더 높은 회사로 올라가고 더 높은 직급과 더 많은 연봉을 받고, 주변에서도 남부러워할 만한 그런 인생이 펼쳐지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30대까지는 그랬었다. 나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느 날 현실이 눈앞에 와 있었다. 저 꼭대기 언저리의 삶은 나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일만 열심히 한다고 기회가 생기지 않고, 건강이 나빠질 정도로 일한다고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다. 나보다는 일단은 이 일만 잘 쳐내자는 마음으로 해왔던 것들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연 나는 잘 살고 있었던 건가?
요즘 나의 인생과 회사 생활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그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회사 8시간은 욕먹지 않을 정도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잘하고, 재택 할 때는 최대한 재택의 이점을 누리면서 일하는 게 목표예요. 그 이후의 시간에는 나를 위해서 쓰고 있어요.” 아무렇지 않은 듯 별일 아니라는 듯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했지만, 이러한 결론을 내리기까지 꽤 많은 고민과 시간이 있었다고 했다. 그녀라고 이러한 결정을 내리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더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서 그동안의 익숙한 직장을 뒤로하고 이직을 결심했을 때는 이러한 결정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라고 ‘조용한 퇴사’가 너무 하고 싶었던 건 아닐지도 모른다.
이 날 우리가 마신 커피는 매일 아침 원두를 로스터링 하는 ‘Espresso CORE’의 롱 블랙이었다. 여리여리하고 향기롭다기보다는 진하고 강한 느낌. 하지만 무겁거나 텁텁하지 않고 깔끔한 게 입 안에서 긴 여운을 주었다. 30분 남짓 그렇게 소소한 듯 무거운 대화를 나누면서 마시기에 딱 적당한 정도의 무게감이 느껴졌다.
커피를 마시는 내내 이런 생각을 했다. 나를 위해 시간을 쓴다는 건 과연 어떤 것일까. 단순히 취미 생활을 하며 나를 위한 시간을 쓰기엔 나에겐 지속적인 소득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직은 내가 해왔던 일들을 좀 더 이어 가고 싶다.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하다 보니 ‘조용한 퇴사’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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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presso CORE
매일 아침 로스팅하는 원두로 신선한 크레마를 맛볼 수 있는 곳
커피가 진하고 묵직하다 보니 라테, 플랫 화이트가 정말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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