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i (짜이)

by mercioon



몇 년도 더 전에 인도에서 만난 사람들과 연극 <인디아 블로그>를 보고 극장 근처 나무 하나란 카페에 갔었더랬다.


인도에 관한 연극을 보고 난 후라 그런지 우리는 여행 추억에 젖어 마구 떠들어댔다.

우리들의 수다를 들으셨는지 사장님께서 메뉴에는 없지만 제대로 된 짜이를 맛 보여 주시겠다며


인도에서 사 온 장비(?)들을 아주 비장하게 여기저기서 꺼내셨다.


(심지어 도사(Dosa : 크레페처럼 얇게 부친 인도식 빵 )를 만드는 두터운 판도 있었다!!)

인도를 여행하던 때가 생각날 때면 다즐링에서 사 온 홍차로 짜이를 종종 만들어 마셨었다.


하지만 밀크티 맛만 날 뿐, 특유의 짜이 향과 맛을 낼 수 없어 그냥 포기했었기에 사장님의 짜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다도를 하시듯 온 정성을 미간의 주름으로 끌어모으시며 짜이를 내리기 시작하자 짜이 향이 훅하고 퍼지면서 가게 안을 가득 채웠다.


사장님께서 타 주신 짜이는 신기하게 향도 맛도 인도에서 마시던 10루피짜리 짜이 맛이 났다.


다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의기양양해하시며 뽀빠이 어깨만큼 어깨를 잔뜩 세워 팔짱을 끼셨다.


이 귀한 인도 짜이의 비밀은 바로 카다몸이라고 귀띔해 주셨다. 한국에서는 구하기 쉽기 않은 식재료라 맛을 내기 쉽지 않단다.

사장님표 짜이 덕에 그 향에 취하기나 한 것처럼 늦은 밤까지 인도 여행 이야기에 젖어들었다.

작은 짜이라는 차 한잔에도 저마다 소소한 해프닝이 있는 것을 신기해하면서.




인도의 유명한 차라고 하면 보통 다즐링 지역의 이름을 딴 고급스러운 홍차를 떠올리기 쉽지만,


인도 여행에서 제일 많이 접하게 되는 차는 아무래도 인도식 밀크티라 할 수 있는 짜이이다.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밀크티라 하기에는 짜이 특유의 향과 맛을 설명하기가 힘들다.


그리고 왠지 영국풍의 카페에서 예쁜 꽃무늬로 된 잔에 마셔야 할 것 같은 밀크티와는 달리,


짜이는 길에서 파는 작은 유리잔에 따라 후루룩 불어 마셔야 제맛인 환경 탓? 도 있는 듯하다.


인도의 찻집이나 레스토랑 어딜 가든 짜이를 팔지만,


배낭여행자들이 제일 많이 마시는 짜이는 아마도 길거리에서 짜이 왈라들이 파는 스트릿 짜이일 것이다.


차가운 물을 벌컥벌컥 들이켜도 모자랄 정도로 더운 나라에서 심심찮게 그 뜨거운 짜이를 사 마시곤 했다.



여행 내내 대부분의 짜이를 스트릿 짜리로 마시긴 했지만, 첫 시음기는 스트릿 짜이가 아니었다.


처음 델리에 도착해 짐을 던져두고 나와 정신없는 빠하르간즈의 인파 속을 밀려다니다 보니 어느새 코넛플레이스 근처까지 와있었다.


정오의 햇빛을 혼자 받은 양 한꺼번에 현기증이 밀려와서 건물 그늘이 길게 늘어진 바닥에 앉아 바다사자처럼 늘어져 쉬고 있을 때였다.


한 인도 사내가 다가와서 말을 걸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온 여행이라지만 첫째로 명심할 것도 인도 사내를 조심할 것, 둘째로 명심할 것도 인도 사내를 조심할 것,


그리고 셋째 역시 인도 사내를 조심할 것으로 들은지라 못 들은 척 그림만 계속 그려댔다.


한두 번 거절하면 보통 포기하고 가는 게 인도 사내들인데 이 자식은 좀 끈질긴 구석이 있었다.


한참을 옆에서 조잘대는데 정신이 뺏겨 마음 약한 여행 초보자는 어느새 그 인도인이 추천하는 찻집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다.


테이블이 5개도 안되어 보이는 아주 작은 찻집이었다. 정말 맛있는 차라며 인도 사내가 짜이를 주문했다.


얼떨결에 들어오긴 했지만, 내가 마실 짜이에 약을 탄 건 아닌가 싶은 말도 안 되는 상상에 가슴이 두 근 반 세근반,


눈앞이 흰색과 까만색으로 뱅글뱅글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속으로는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가게를 뛰쳐나가는 상상을 했지만 두발은 강력 본드를 야무지게 칠해놓은 양 바닥에 꼭 붙어있었다.


안쪽에서 부엌과 홀을 얄팍하게 가리는 꼬질꼬질한 천이 걷히고 우리가 주문한 짜이가 나왔다.


찻집이라고 나름 뽀얀 컵에 같은 색의 찻잔을 받쳐 나왔는데, 순간 그 뽀얀 잔과 대비되는 검은 잔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오. 내가 예상하는 그게 아니길 바라며 다시 한번 눈을 크게 뜨고 쳐다봤지만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누구의 터럭인지 새카만 짧은 털들이 찻잔 위에 마구 뿌려져 있었다.


찻잔 안 짜이에는 없길 바라며 시선을 옮겨봤지만, 혹시나 체할 것을 염려라도 해주듯이 굵고 짧은 털들이 둥둥 떠있었다.


차라리 약을 타지...


울상이 되어 인도 사내를 쳐다보자, 그 망할 'no problem~~'을 외치며 나에게 후후 불어먹으라는 시늉을 했다.


한번 더 망설이자 그는 지금 당장 쳐마시고 이 어메이징한 짜이에 대한 감상을 토해내라는 듯 큰 눈을 한번 더 크게 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원샷으로 넘겼다.


뜨거운 짜이가 타들어가듯 넘어가면서도 알 수 있었다... 굵고 짧은 털들이 같이 넘어가는 것을..


털로 된 짜이를 마신 충격으로 그 인도 사내가 뭐라고 떠들었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가게를 나설 때 나는 보았다.


그 꼬질꼬질한 천 너머로 주인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나가길 기다리는 짜이 컵 위에서 거울을 보며 면도하는 것을...




여행 중 짜이 생각이 간절할 때는 장시간 이동을 하고 새벽에 도착했을 때이다.

(버스든 기차든 도착지에 새벽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아직 어둑어둑한 도시에 내려 추위에 바르르 떨며 주위를 둘러보면,


멀지 않은 곳에서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하얀 연기를 마구 뿜어대는 릭샤 왈라를 발견할 수 있다.


천녀유혼의 왕조현이 하얗고 긴소매를 살랑거리면 홀라당 홀려 쫓아가는 장국영처럼,


하얀 연기에 이끌려 어느새 따뜻한 짜이를 주문하고 있다.


새벽 얼은 몸을 녹여주기도 하고, 고단한 몸을 잠시나마 번쩍 들게 해주기도 하며, 부족한 당을 채워주기도 하는 200원짜리 인도판 에너지 드링크.


새벽 시간 마성의 짜이.



인도는 땅덩이가 큰 만큼 이동 시간도 참 지리하게 길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보통 침대칸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슬리퍼칸에도 심심찮게 짜이 왈라들이 보온병을 들고 짜이를 판다.

주로 낮시간에 팔아서 많이 사 마시진 않지만 이동 시간이 길어지면 당을 보충하기 위해 사 마신다.


5루피 정도로 일회용 플라스틱 잔에 따라주는데,


아.. 이건 플라스틱이라 그래야 되나, 비닐로 된 잔이라고 해야 되나...


뜨거운 짜이를 따르자마자 찻잔의 형태를 잃어버리고, 제 한 몸 헌신하듯 물컹해지며 신메뉴 플라스틱 맛 짜이를 맛보게 해준다.


당 충전하려다 건강을 해치는 느낌 아닌 느낌..




비싼 등급의 기차를 타게 되면,


역시나 플라스틱 컵이긴 하지만,


제대로 된 빨간 컵에 티백으로 된 짜이가 무료로 제공된다.


간단한 먹을거리와 함께.


보통의 길거리 짜이는 작은 유리잔에 팔긴 하지만, 심심찮게 흙으로 만든 컵에 짜이를 팔기도 한다.


(주로 라씨를 붉은 진흙으로 빚은 도자기에 담아 파는 경우가 많다.)


다 마시고 시원하게 바닥에 던져 깨면 되는데, 처음에는 한번 마시고 버리기 아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던지다 보니 은근히 스트레스가 풀려 집어 던지는 맛에 한잔을 더 마시게 되는. 에잉? 이것은 상술?


암튼 내 안의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싶을때 좋은 아이템이다.


(흙으로 만든 컵이라 위험하다거나, 환경을 오염시키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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