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의 이혼 후 나는 어른아이로 자라고 있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하고 아빠의 사업이 쫄딱 망했다. 집 안에 있던 가전가구들이 모두 사라진 집. 아빠는 사업을 다시 일으키려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어린 나이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아빠는 사업을 다시 일구기 위해 이곳저곳에 돈을 빌리고 꽤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할머니는 우리 집에 짐을 풀고 살림을 했다. 이미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 남매 때문에 할머니는 마음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도 우리 남매에게 모진 말을 많이 했다. 우리 집엔 온통 적막 아니면 할머니의 잔소리뿐이었다. 한번 물고를 튼 할머니의 잔소리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가혹했다. 할머니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엄마를 향한 비난이었다.
막냇동생은 아주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의 이혼을 경험했다. 동생의 나이는 고작 세 살이었다. 지금 아이를 키우는 심정으로 생각하면 정말 벼락을 맞아도 시원찮을 부모들이 내 부모였다. 어떻게 저런 핏덩이를 남겨두고 그렇게 싸울 수 있었을까. 어떻게 저 소중한 세 살 아기를 두고 엄마는 집을 나섰을까. 어린 동생은 매일 밤 엄마를 찾아 울었다. 할머니는 엄마, 아빠가 이혼한 그다음 해에 집에 들어왔으니 동생의 나이가 네 살이 됐을 무렵일 것이다. 동생이 "엄마 보고 싶어"라고 울부짖을 때마다 할머니는 엄마 욕을 대놓고 했다. 엄마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우리에게 보란 듯이 쏟아부었다.
"집 나간 네 엄마가 뭐가 좋다고 보고 싶다고 울어?! 그렇게 울 거면 네 엄마한테 전화해서 데려가라 해. 당장 엄마 집에 가서 살아!!"
엄마 욕과 고부 갈등에 대한 이야기들까지. 우리가 들은 채 만 채 하면 할머니는 혼잣말로라도 크게 엄마 욕을 했다. 너무 듣기 싫었다. 나도 이혼한 엄마가 미웠지만 할머니가 내 엄마를 욕하는 건 괜히 싫었다.
네 살 동생은 엄마가 보고 싶을 때마다 내 방으로 왔다. 내 품에 기대 울고 내 품에 안겨 잠을 잤다. 안쓰럽고 불쌍한 동생. 나를 늘 좋아했던 동생은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나만 찾았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걸어오는 길, 난 어린이집에 들러 동생을 찾았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문으로 걸어 나오던 동생은 언니인 나를 발견하면 환한 웃음을 짓고 뛰어왔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나는 어린이집 가방을 멘 동생과 손을 잡고 집으로 걸어갔다. 작고 포동포동한 동생의 손이 너무 귀여웠다. 어떤 날은 친구들과 약속을 잡아 나가려고 하면 동생이 내 발목을 잡고 울었다.
"언니 같이 가. 언니 나도 같이 갈래~"
그 작은 손을 거절할 수 없어 난 친구들과의 만남에 항상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싫어하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동생을 귀여워하고 예뻐해 줬다. 그 친구들에게 항상 고마웠다.
동생이 초등학생이 되었다. 할머니는 홀로 동생의 운동회로 향했다. 할머니는 단 한 번도 빠짐없이 구부정한 허리로 김밥을 싸서 동생의 학교에 갔고 운동장 가장자리에 돗자리를 폈다. 난 중학교 때 엄마, 아빠가 이혼했기 때문에 엄마가 늘 내 초등학교 운동회에 왔다. 사진첩을 뒤져보면 엄마와 운동회 날 찍은 사진도 제법 많다. 하지만 동생의 운동회에는 단 한 번도 엄마나 아빠가 찾아간 적이 없었다. 늘 동생을 챙긴 건 할머니였다.
초등학교 6학년이던 동생의 운동회날. 큰 마음을 먹고 친구들과 함께 동생의 학교를 찾아갔다. 동생의 반 친구들에게 아이스크림도 사서 나눠주고 동생이 경기를 할 때면 큰 목소리로 응원도 해줬다. 늘 할머니만 앉아있던 돗자리에 나와 내 친구들이 함께 자리했다. 부끄러워하면서도 너무 좋아하던 동생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난 그렇게 불쌍한 내 동생의 엄마 역할을 해주고 있었다. 나도 마음속이 다 자라지 못한 어린아이였지만 어쩔 수 없이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면서 난 마음속으로 엄마, 아빠를 향한 미움을 더욱더 키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