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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향 Oct 09. 2019

안녕, 나의 첫 부동산

부동산 기자의 투자노트

  조금 전 통장으로 100만 원이 입금됐다. 만감이 교차했다. 안도, 아쉬움, 새로운 계획….

  100만 원은 서울 후암동 원룸을 팔기로 한 가계약금이다. 지난 주말 지방에서 대학생 아들이 살 원룸을 고르기 위해 상경한 중년 여성이 사흘간 고민 끝에 계약을 하기로 연락이 왔다. 아직 계약서를 쓰지 않았지만 담당 공인중개사에게 간단한 주의사항이 문자메시지로 왔다.



  계약 파기 시 매수인 계약금 환불 불가. 매도인 배액 배상.



  태어나서 처음으로 팔아보는 부동산. 그리고 처음 내 손으로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고 억대의 돈거래를 해본 부동산 투자였다.



  2013년 여름, 혼자서 미국 뉴욕과 친구가 사는 캐나다 브래드퍼드를 여행하고 돌아온 나는 곧장 부동산을 계약했다. 난생처음 1억 원 넘는 계약을 하면서 아무런 준비나 정보도 없이 덜컥 진행한 일이다.



  2007년 취업과 함께 상경했을 때는 아빠가 여러 집을 다니며 비교해보고 공인중개사와 의논해서 고른 작은 오피스텔에 살았다. 중개수수료도 전세금 5000만 원도 다 아빠가 내줬고 계약서도 대신 써줬다. 낡은 원룸이지만 혼자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 기뻐서 6년 동안 살며 열심히 가꿨다. 작은 소파를 사고 아기자기한 책장에 책들을 쌓아놓고 포인트 벽지도 붙였다. 하지만 오래된 건물이라 툭하면 바퀴벌레가 출몰한 데다 살아 보니 비좁은 오피스텔 원룸은 감옥이나 다름없었다. 창문도 반만 열리는 형태라 답답할 때는 집을 두고 모텔에 가서 잤다.



  언젠가 이사하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빨리 실천에 옮기지 못한 건 모아놓은 돈이 없었을뿐더러 생전 해보지 않은 부동산 거래를 어디서 어떻게 시작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당시만 해도 인터넷 정보가 발달했던 때라 틈틈이 검색해보고 마음에 드는 원룸이 있으면 부동산에 전화를 걸어 집 구경도 다니며 나름 이런저런 경험과 안목을 쌓아갔다.



  부동산도 인연이 있는 것 같다. 가끔 마음에 드는 집을 발견해도 선뜻 계약을 진행하지 못하고 "다시 연락드릴게요."라는 말로 흐지부지하던 상황이 반복되던 중에 후암동 원룸은 보자마자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암동은 당시 내게 낯선 동네였다. 서울역에서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점이 좋았는데 번잡하지 않고 고요했다. 집을 보던 날 창문을 열었더니 아이들 하교 소리와 동네 개들이 산책하며 짓는 소리가 정겨웠다. 전에 살던 오피스텔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것이 금지돼 동물을 볼 수가 없었다.



  북쪽 창문을 열면 남산서울타워가 가까이 보이고 동쪽 창문은 야외 테라스로 연결됐다. 집 앞에는 주민센터와 지구대, 동물병원, 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예쁜 카페가 있었다. 지금도 한 달에 한번 이상 가는 카페 후암동이다. 걸어서 5분을 올라가면 남산도서관이 있었다. 나는 집을 본 날부터 매일매일 하루라도 빨리 이사하고 싶은 마음에 밤잠도 못 이룰 정도였다. 아빠가 준 전세금에 주택담보대출과 신용대출을 총동원해서 잔금을 치르고 2013년 12월 드디어 입주를 했다.



  그 집에서 메리와 슈슈가 내 가족이 됐고 남편을 만났다. 첫째 딸 율이가 생겼다. 친구들을 불러서 밤새 맥주파티를 하고 회사 회식을 한 날은 후배들의 아지트가 됐다. 어찌 보면 내 인생의 가장 자유롭고 즐거웠던 추억이 다 후암동 원룸에 고스란히 있다. 원룸만 아니었으면 딸들이 조금 클 때까지 불편해도 살았을 텐데 아쉽지만 세를 주고 이사를 나와야 했다. 아이들이 독립한 후에 꼭 다시 와서 강아지 고양이 한 마리씩 키우며 살자고 남편과 약속했다.



  당시에는 금리가 지금보다 낮아서 월세를 내는 것보다 대출이자를 내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주택담보대출 이자는 매달 20만 원, 원금이 30만 원씩 빠져나갔고 세입자에게 월세 50만 원을 받았다. 첫 세입자는 4년을 살았고 금리가 높아져 감당하기가 힘들어서 전세 전환 후 세입자가 바뀌었다. 전세금으로 주택담보대출을 갚았다.



  갑자기 부동산을 팔게 된 건 여러 자금난이 한꺼번에 겹쳐서다. 출퇴근 문제로 신혼집도 전세를 주고 회사가 가까운 전셋집으로 이사 왔는데 정부의 2주택자 대출규제로 전세자금대출 연장을 거절당했다. 2년 안에 매각한다는 확약서를 제출하고 겨우 연장했다. 또 혼인신고 5년 차인 내년 5월 안에 후암동 원룸을 팔지 않으면 양도소득세 중과 대상이라 매각이 불가피했다. 이런 상황에 신혼집 세입자 전세가 만료됐고 전셋값이 떨어져 2700만 원을 추가로 마련해야 하는 문제까지 터졌다. 신용대출을 더 받을 수 있었지만 연일 경제위기가 터진다는 뉴스가 나오는 상황에 이 많은 부채를 다 짊어지고 가기가 불안했다. 부동산 경기가 급격히 나빠지고 빨리 처분해야 한다는 마음이 급해서 시세보다 2500만 원을 내린 급매로 내놓았다.



  "제가 정말 사랑하는 집이에요. 좋은 분께 갔으면 좋겠어요."



  집을 보러 온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다가 나도 모르게 수다를 떨었다. 집이 인연이듯 사람도 인연인 듯하다. 집을 매수하기로 한 아주머니는 나와 동향이고 아빠와 같은 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는 선생님이었다.



  "이 넓은 서울에서 천안 사람을 다 만나다니! 너무 반가워요!"



  아주머니도 신기해했다. 이번 주 토요일 정식 계약을 하기 위해 다시 부동산에서 만날 약속시간을 정했다. 몇 년 동안 열심히 일해서 율이, 솔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이사하고 싶은 집을 봐 뒀는데 후암동 원룸에서 5분 거리다. 다시 목표가 생겼다.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성공투자의 정석은 청약저축 가입-목돈 마련-새 아파트 분양이다. 직장인 월급 수십 년치를 모아도 안 되는 수억 원을 한 번에 벌 수 있는 로또 외의 유일한 기회다. 요즘은 가끔 후회도 든다. 나는 재테크에 실패한 걸까.



  2013년 12월 후암동 원룸을 산 가격이 1억 5700만 원이었고 5년 10개월 만에 매도하기로 계약한 금액은 1억 9500만 원이다. 그 사이 약간의 월세 수입이 있었지만 로또아파트에 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매일 같은 부동산 기사를 반복해 쓰면서 드는 생각이 있다. 로또아파트의 기회는 상당 부분 운에 기대야 하는 불확실성이 있다는 점에서 로또라는 이름이 단지 일확천금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그 낮은 확률에 당첨되고도 눈물을 머금고 계약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얼마 전 과천자이에 당첨된 지인이 중도금 대출을 받을 수 없다고 해서 계약을 포기했다. 부부가 둘 다 국내외 대기업에 다니는 고소득직이어도 이런 수준인데 수많은 도시의 소시민에게 로또아파트는 별나라 이야기다.



  부동산 투자든 뭐든, 내가 가진 것 안에서 분수에 맞게 소신껏 소비하는 게 인생을 사는 정답이다. 남과 비교하는 삶은 한도 끝도 없다. 브랜드아파트와 명품백을 갖고 나면 고급 단독주택과 한정판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에게 물질적인 풍요로움보다 가치 있는 삶을 물려줄 방법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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