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세입자 일기 (9)
서울의 3억 원대 전세 아파트에 살고 있는 A는 최근 집주인이 국세를 체납해 전셋집이 압류됐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임대차계약서에 사인한 당시만 해도 등기부엔 근저당 등 채무관계가 없었기에 처음엔 뭔가 잘못된 것인 줄 알았다. 삶의 터전이자 가족을 지켜주는 울타리인 집이 압류되는 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집주인은 1주택자로 본인 역시 전셋집에 살고 있는 평범한 중산층의 자영업자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정부의 방역 조치로 매출 피해를 입었고 결국 폐업하며 소득세를 체납했다.
인천의 2억 원대 전세 아파트에 거주한 B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계약 당시 전셋집엔 근저당 설정도 없었지만 집주인은 계약기간 중간에 캐피털 신용대출 5000만 원을 받았고 국민건강보험 체납액이 발생했다.
B는 당초 재계약을 앞두고 집주인과 '주택임대차보호법'에 따라 임대료 5% 인상에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압류 이후 집주인은 말을 바꿔 법정 한도의 다섯 배인 5000만 원을 올려주면 빚을 갚고 압류를 해제하겠다고 제안했다.
A는 얼마 전 육아휴직을 시작한 회사 후배다. B는 대학 동기다. 이들은 사회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지위가 있는 자신이 어떻게 이런 일을 당할 수가 있는지 지금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집값 대비 전세금 비율'(전세가율)이 높은 이른바 깡통전세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확산되며 이 같이 전세금을 볼모로 잡히는 세입자가 속출하고 있다. 경기 외곽이나 인천, 서울 강서구 화곡동, 은평구 등 주로 집값이 싼 동네가 깡통전세 위험지역으로 떠올랐다. 실제 전세금 미반환 사고가 속출하기도 했다.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2021년 4월 평균 전세가율은 전국 64.9% 서울 61.2%를 기록했다. 세종은 57.0%로 전국에서 가장 낮다. 전세가율이 높은 상위 지역을 보면 광주 71.0% 인천 70.1% 강원 69.2% 등이다.
집값 대비 전세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경우 미반환 사고 위험도 높을 수밖에 없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전세가율이 70% 이상일 때 계약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WM스타자문단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집값이 오를 가능성이 낮은 상태에서 전세금만 계속 오를 경우 전세가율이 70% 이하라도 위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B의 경우 아파트값이 5억 원 후반 대고 전세금이 2억 원, 캐피털과 국민건강보험 체납액이 1억 원으로 채무 상환 후 최소 1억~2억 원이 남겠지만 이 역시 안심할 수만은 없다. 전세금 미반환 발생 시 세입자가 소송을 통해 경매를 신청할 수 있는데 실제 낙찰액은 감정평가금액 대비 낮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경매는 유찰 횟수가 늘어날수록 낙찰액도 계속 떨어진다. 세입자가 후순위채권자일 땐 빚 청산 후에 전세금을 다 돌려받지 못할 수도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비슷한 사건이 올라왔다. 서울 은평구 신축 빌라에 전세로 사는 세입자의 집주인이 지난해 종합부동산세 7억 원을 체납해 세무서가 전셋집을 압류했다. 집주인은 서울, 경기, 인천 등에 빌라와 오피스텔 200~300채를 보유한 주택임대사업자로 밝혀졌다.
세입자는 소송과 경매를 신청해 전셋집을 낙찰받기로 했지만 낙찰자가 종부세도 변제해야 한다는 '국세기본법'의 규정도 문제였다. 종부세는 전세권 등의 등록 일자와 관계없이 모든 채권에 우선하도록 규정한다. 해당 규정은 훗날 주택 1139채를 임대했다가 돌연 사망한 이른바 ‘빌라왕‘의 사건으로 세입자에게 유리하도록 바뀌었다.
코로나19 이후 자영업 폐업이 늘면서 세금을 체납하는 사례가 많아졌고 국민 절반에 이르는 세입자의 주거불안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임대차계약서 작성 시 등기부상 근저당 설정 등을 반드시 체크하고 공인중개사의 설명 의무가 더 강화돼야 한다. 계약서에 표기를 의무화하는 방법도 있다.
현재 대부분의 공인중개사가 전셋집 근저당 설정이나 채무금액 등에 대해선 예비 세입자에게 고지하지만 국세 체납의 경우 제대로 설명이 이뤄지지 않는다. 이때 세입자가 국세청을 통해 집주인의 국세 체납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집주인의 신분증 사본이 필요하므로 사실상 동의를 받아야 했는데 이는 2022년 빌라왕 사망 사고를 계기로 폐지됐다. 이제는 세입자가 집주인 동의 없이 국세 체납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지만, 임대차계약서를 첨부해야 하는 문제 때문에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 체납 여부를 알 수 있어야 보다 도움이 될 수 있다.
때때로 재계약 전세금을 올려주면 국세 체납을 해결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이를 어기는 집주인도 있다는 게 공인중개사들의 얘기다. 세입자는 이런 사고에 대비해 집주인의 국세 체납금액을 확인한 후 세무서에 가서 직접 세금을 납부하고 차액의 보증금만 지불하는 방법을 제시할 수 있다.
계약 이후 발생하는 채무불이행에 대해선 세입자의 권리가 우선하고 이전 채무의 경우 최소한의 대비 방법을 보장해야 한다. 정부의 보증금 보호한도 상향조정 등 제도 개선도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