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by 메리힐데
인격은 당신이 하는 무엇이 아니라 당신이 그것을 하는 방식이다



인간으로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은 지금껏 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요동치는 본질적 질문이었다. 이에 대해 내가 내린 답은 이 땅의 짧은 생애 동안 정의롭고 사랑스럽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정의, 사랑, 겸손은 무엇인가. 일률적으로 정의 내릴 수 없는 가치들은 또다시 내게 어려운 질문으로 다가왔다. 가치에 대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렵고 복잡하게 느껴지는 일이다. 그러다 문득, '정의'라는 단어가 없다면 나는 무엇이라고 이야기할까?라는 물음이 들었다. '정의'대신, '사랑'대신, '겸손' 대신에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까?


'정의'라는 단어가 없어진다면, 나는 '옳은 것을 위하여'라고 말하겠다. '옳은 것'이라는 말도 쓸 수 없다면, 나는 '선함을 위하여'라고 말하겠다. 내게 정의는 선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단어가 없어진다면, 나는 '언제나 함께할게'라고 말하겠다. 내게 사랑은 함께하는 것이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없어진다면, 나는 '제가 잘못 생각했을 수 있겠습니다'라고 말하겠다. 내게 겸손은 내가 틀릴 수 있음을, 내가 언제나 옳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평생 배우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나의 답변은 '이 땅의 짧은 생애 동안, 선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함께하며 배우는 삶을 살 것'이 된다.


정의, 사랑, 겸손의 자세로 산다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시작된다. 나아가 국가와 세계의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사회적 책임을 생각한다면, 나의 이러한 소명이 개인적 관계를 넘어 가깝고 먼 곳의 사람들과의 연결과 연대로 확장될 수 있기를 바란다.



에드워드 위트몽에 따르면 자기는 개인의 참된 양심뿐 아니라 개성화 욕구, 즉 참된 자기가 되려는 욕구를 일으킨다. 심리학적 의미에서 개성화 욕구는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용기를 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개인적 양심과 사회적 양심을 모두 품고 살아간다. 전자는 주로 사적이고 개인적인 도덕의 문제와 관련되고 후자는 공적 도덕성 또는 공동선이라 일컫는 것들과 관련된다.


평생 동안 개인에게 들려오는 양심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가 가진 각자의 성향에 따라 다르게 발현된다. 우리 모두는 유전적으로도 모두 다 다른 원자의 집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내 몸과 똑같은 배열을 가진 원자의 집합은 우주 어디에도 없다는 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르다. 물질이 다르므로 정신도 다르다. 같은 시대를 사는 우리지만, 각자의 가치와 생각과 정신은 다르다. 모두가 서로 다른 덕분에 우리는 어우러질 수 있고, 함께일 수 있고, 각자의 것을 나누고 베풀며 더 넓은 무엇인가를 추구하고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사는 세상에 부여한 가치이다.


나에게 삶이란 '충분히 다양한 것. 다름이 모여 만들어진 무지개를 느끼는 것. 그리고 마음껏 행복한 것'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은 '참된 나'를 찾는 일이다. 다양하기 위해서는 충분히 각자로 살 수 있는, 개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삶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만의 것, 즉 자신에게 익숙하고 몸에 배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인식해야 한다. 2편 <제일 먼저, 버리기>에서 필자는 나를 구성하는 것들 중 내가 아닌 것들을 버리는 연습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내가 아닌 것들을 버려내는 작업을 어느 정도 마쳤다면, 이제는 진정한 자신만의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할 때다.


'나'는 무엇인가.

그동안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각은 수차례 해왔다. 그러나 '나는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해본 일이 없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존재하는가? 산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같은가? 5분 전의 나는 지금의 나와 같은가?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라면, 나를 찾는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아니, 찾을 수는 있는 것일까?


과연 어느 시점의 내가 진짜 나일까? 만약 '현재의 나'만이 의미가 있다면 과거의 자아에 대하여 후회하거나 비판하거나 칭찬하는 일이 의미가 있을까?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너 자신을 알라." 이 문장은 소크라테스가 한 말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히 누구의 말인지는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인간의 삶에 되뇌어 온 문장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것을 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나는 맛있는 원두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 어쿠스틱 기타 음악을 좋아한다.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좋아한다. 글로 쓰인 소설을 읽으며 내 상상 속에서 여러 장면으로 펼쳐내 보는 것을 좋아한다. '법', '선과 악', '정의'에 대하여 쓰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을 읽어보는 것을 좋아한다. 크리스마스를 좋아한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새로운 대화를 좋아한다. 새해 인사를 나누고 안부 묻는 것을 좋아한다. 무계획의 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한다. 단독공연보다는 여러 악기들의 호흡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좋아한다. 화려한 옷보다는 심플한 옷을 좋아한다. 밤에는 조용하게 방에 불을 끄고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 있는 것을 좋아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낼 때 행복하다. 딸기를 먹을 때는 반을 잘라 플레이팅 하는 것을 좋아한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언제 행복한지 안다. 그러면 나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나를 알려면 몸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반 명제로 확장하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과학의 질문은 인문학의 질문에 선행한다. 인문학은 과학의 토대를 갖추어야 온전해진다.'
-유시민, '문과남자의 과학 공부' 중에서-

나를 알기 위해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더하여 '나는 무엇인가'에 대하여 알 필요가 있다. 즉, 인간에 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떠한 속성을 지니고 있는지. 감성과 이성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뇌의 구조와 작동방식을 알아야 하고, 인간의 본성을 모르고는 자기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이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독자분들께는 *칼 세이건 지음, '코스모스' *브라이언 그린 지음, '엔드 오브 타임 *리처드 파인만 지음, '파인만!' *에드워드 윌슨 지음, '통섭: 지식의 대통합' *정용, 정재승, 김대수 공저, '1.4킬로그램의 우주, 뇌' *매튜 코브 지음, '뇌 과학의 모든 역사' *임마누엘 칸트 지음, '순수이성비판/실천이성비판' *스티븐 핑거 지음,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나로 살면 살수록, 나를 알고자 하는 것은 명쾌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답을 찾는다기보다는 기나긴 여정을 떠난다는 말이 더 맞는 것 같다. 알아가기도 하고 만들어가기도 하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여정 말이다. 어쩌면 나를 알고 나로 산다는 것은 시간의 개념을 초월해 모든 순간들을 품어야 하는 새로운 도전일 수 있겠다.


'나로 산다는 것'은 평생에 걸쳐 내 양심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 듣고 배우고 내 나름의 가치를 세우는 것. 그 안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들을 하며 믿음을 가져보는 것이다.


원래 인간은 다양한 것이고, 다 다르기 때문에 함께할 때 아름답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누군가가 바라는, 사회가 원하는, 부모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되기 위해 자신을 애써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연스럽고 자유분방하게 다른 누군가가 아닌 참된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지금 이 순간, 적어도 나에게 '나로 산다는 것'은 이 땅의 짧은 생애 동안 선한 마음으로 서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며 배우는 삶을 추구해 보는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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