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해볼 수 있는 인생은 아니니까
4월이 되면 본격 텃밭 라이프가 시작된다.
상추, 대파 등 비교적 낮은 기온에서도 잘 버텨주는 몇 가지 작물만 심어둔 황량했던 밭에 농부의 식성과 취향이 담긴 다양한 농작물들이 나타나는 시기.
어떤 밭은 쌈 채소만으로 5평짜리 밭을 꽉 채우기도 하고, 어떤 밭은 열무 씨앗을 잔뜩 뿌려서 귀여운 새싹들이 가득 나오기도 하고, 또 어떤 밭은 고추만 가득, 대파만 잔뜩. 어떤 밭은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푯말이 사이좋게 세워져 있고 허브에 꽃 화분까지 심겨 있기도 하다. 방문할 때마다 조금씩 변하는 이웃들의 텃밭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4월이 되면서 우리 부부도 본격적으로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며칠 전부터 빈 종이에 5평 짜리 우리 집 텃밭 모양을 그려놓고 구획을 나누어 무얼 심을지 신중하게 고민했다. 농장 사장님과 양가 부모님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을 검색해서 얻은 정보도 참고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우리의 의견이라고 생각했다. 남들이 많이 심는 인기 작물이 아니라 우리 부부가 심어보고 싶은 작물, 우리가 잘 먹는 농작물 위주로 키워 보기로 했다.
키워서 돈 받고 팔 것도 아니고, 농사를 업으로 삼을 것도 아니고, 그저 취미처럼 연습처럼 가볍게 시작한 텃밭인 만큼 재밌게 운영하고 싶었다.
그래서 딸기 모종을 심었다.
딸기는 여러해살이라서 올해 심으면 내년부터 과실이 많이 열린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의 텃밭 계약 기간은 1년이다. 심은 해에도 딸기가 아예 안 열리는 건 아니라고 하길래 그냥 더 깊게 고민하지 않고 일단 심기로 했다. 그저 딸기를 키워보고 싶었다. 텃밭 가는 길에 있는 종묘사에 들러 킹스베리 모종 한 개, 설향 모종 세 개를 소소하게 구입했다. 올해는 열매가 얼마 안 열릴 거라는 종묘사 사장님의 말에 남편은 앞으로 딸기 같은 건 사서 먹는 게 훨씬 낫겠다고 말했다.
다만 나는 생각이 달랐고, 내 마음을 남편에게 넌지시 전했다.
"나는 수확량에 상관없이 그냥 내가 좋아하는 과일을 내 손으로 직접 키워 먹어보고 싶어. 그냥 해보고 싶어. 딸기는 어떤 꽃이 피고, 어떤 모습으로 열매를 맺는지. 이 손톱보다도 작은 꽃이 달콤한 딸기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면 재밌기도 하고, 그동안 딸기를 사 먹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들 것 같아. 물론 우리는 농사를 하나도 모르니까 딸기 수확량이 적을 수도 있고, 아예 실패할 수도 있겠지만, 키워보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그저 실패할 것 같아서 아예 시도조차 안 하는 건 너무 재미없는 것 같아! 어차피 우리는 농사를 지을 줄 모르고, 모든 게 처음이니까 공부한다고 생각하고 연습하는 셈 치고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배워가자. 이왕 자급자족 꿈꾸며 시작한 주말 농장인데 나중에 시골에 내려가 살게 되면, 내가 제일 좋아하는 딸기는 당연히 키워 먹어야 하잖아! 연습해야지. 그리고 여보, 그래서 내가 엄청 조금만 산 거야. 나도 실패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말이지."
진심이었다. 그냥 해보고 싶었다. 해보고 싶다고 해서 뭐든 다 해볼 수 있는 인생도 아닌데, 일단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하면서 살고 싶다. 올해 결과물 수확에 실패해도 우리 인생은 어떤 피해도 받지 않는다. 책임질 것도 없다. "실패했다!" 그리 말하고 넘기면 될 뿐인 일이다.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농사만큼은 특히나 더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가꿔보고 싶다.
딸기 모종은 적응한다고 하루이틀 시들했지만 금세 땅에 적응하고 뿌리를 튼튼하게 내렸다.
새하얀 꽃은 어느새 엄지손톱만한 크기의 열매가 되었고, 딸기 크는 모습을 보느라 텃밭에 가는 날이 기다려지곤 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딸기 모종은 훨씬 더 잘 자라주었고, 딸기도 주렁주렁 열렸다. 모종을 심은 지 한 달쯤 지나자 알이 굵어진 딸기부터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제일 예쁘고 큰 딸기를 신중하게 골라 줄기에서 톡 떼어내어 조심스럽게 물로 씻었다. 양손으로 딸기를 잡고 큼직하게 한 입 베어문 순간에 느낀 달달한 감동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마트에서 사다 먹은 그 어떤 딸기와도 비교할 수 없는 향긋한 딸기 향이 입안 가득 퍼졌고, 아주 달콤했다. 다 먹고 난 이후에는 코끝에 딸기 잔향이 오래도록 맴돌았다. 노지에서 자란 딸기는 맛이 없다고 들어와서 별 기대를 안 했는데 내 인생 최고로 맛있는 딸기였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에서 태리는 사과를 맛있게 따 먹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서울에서 먹은 건 다 밍밍했는데."
그러자, 태리의 친구는 이렇게 답한다.
"야, 그거랑 방금 밭에서 따 먹는 거랑 같냐."
딸기는 밭에서 방금 따 먹는 맛이 확실히 다르다는 것을 내게 제일 처음 알려준 과일이었다. 이후로 나는 텃밭에 갈 때마다 제일 먼저 딸기부터 살폈다. 아직 채 익지 않아 푸른 딸기를 볼 때면 빨리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익은 채로 흙에 닿아 이미 물러져버린 딸기를 보면 마음이 아팠다. 딸기는 땅과 물에 닿으면 금방 물러버린다는 걸 경험으로 배우면서 나중에는 폴대를 이용해 줄기를 세워보기도 했지만, 비가 자주 오면서부터 입으로 들어가는 딸기보다 땅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양이 더 많아졌다.
아쉽지만 그해의 딸기 수확은 그렇게 끝났다. 여름작물을 심느라 공간이 부족해지면서 더 이상 열매를 맺지 못하는 딸기 모종은 뽑아냈고, 그다음 해의 텃밭에는 남편의 반대로 딸기를 심을 수 없었다. 확실히 선배 농부들이 말하는 것처럼 딸기는 노지에서 키우기 꽤 어려운 작물이고, 들이는 품에 비해 수확이 별로인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딸기 심기를 참 잘한 것 같다. 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법이니까.
매년 겨울, 마트에서 딸기를 만날 때마다 내가 키워서 먹었던 딸기가 생각난다. 어떻게 자라서 어떤 꽃이 피고 딸기가 되는지 그 모습을 알게 된 만큼 딸기가 더 맛있어졌고, 딸기를 사 먹는 돈이 아깝지 않아졌다. 언젠가 시골살이를 하게 된다면, 그래서 1년씩 계약해서 쓰는 땅 말고 진짜 내 소유의 밭이 생기면, 제일 먼저 딸기 모종을 잔뜩 심고 싶다.
텃밭 이름은 베리 머취 딸기 농장. 리틀 포레스드의 시즌 2다.
* 더 많은 이야기는 <나만의 리틀 포레스트에 산다> 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