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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Sep 20. 2018

역시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혀~

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출판번역 아카데미가 개강을 맞았다. 지금까지 프리랜서가 되기 위한 기초지식 쌓기에 매진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번역 기술을 배울 시간이 온 것이다. 어딘가에 입학하거나 입사하기 위한 점수 따기용 공부가 아니라 그 자체로 하나의 기술이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지금부터 배울 지식은 말 그대로, 어르신들이 입이 닳도록 말씀하시는 “역시 사람은 기술을 배워야 혀~”의 바로 그 ‘기술’이었다.


사실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약 16년 간 공부를 한 결과 내게 남은 것은 ‘OO대학 OO과 졸업생’이라는 피상적인 타이틀 뿐이었다. 그 긴 시간을 투자해서 얻어냈건만, 회사의 톱니바퀴에 몸을 끼워 넣지 않고는 쌀 한 줌, 라면 한 봉지도 가져다주지 못하는 그 타이틀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하지만 이제부터 배울 기술은 (물론 열심히 하고  한다는 전제 하에) 내가 세상 어느 곳에 있든 적어도 내 입에 풀칠 정도는 시켜줄 것이다. 그 시점에서는 그게 바로 내 목표였다. 뭐가 됐든 회사 없이 먹고 살 수 있는 인간이 되는 것.


아카데미 과정은 번역에 꼭 필요한 문법 지식을 배우는 입문반과 문맥을 살리고 오역을 없애는 훈련을 받는 중급반, 고난도의 텍스트를 반복 실습하며 데뷔 평가를 받는 실전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 3개월 동안 입문반 수업을 들으면서 중급반 편입 테스트에 떨어진 게 오히려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아직 영어 실력도 국어 실력도 모자란 내게는 기초 강의도 낯선 지식 투성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입문반 수업을 듣는 그 3개월은 내가 그때부터 첫 계약을 따내기 전까지 겪은 모든 과정 중에서 가장(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희망적인 미래를 꿈꿀 수 있던 기간이었다.


입문반은 강의 난이도도 낮고 과제 부담도 크지 않은 만큼 프로 출판번역가를 꿈꾸는 사람뿐 아니라 단순히 번역에 조금 관심이 있는 사람이나 업무상 기초적인 번역 지식이 필요한 회사원들도 많이 들었다. 자연히 수업 분위기는 밝았고, 과제 검토를 할 때도 따끔한 질책보다는 희망적인 격려가 주를 이루었다. ‘문장이 매끄럽다’, ‘표현이 풍부하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들을 때면 선생님께 칭찬을 받은 유치원생마냥 마음이 몽글몽글 부풀었다. 김칫국을 마시기엔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햇살 가득한 어느 카페에서 재미난 책을 우리말로 옮기며 한적하게 지내는 미래의 내 모습을 나도 모르게 자꾸만 그려보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한들한들 번역 공부에만 매진했다. 아카데미 커리큘럼은 주 1회 강의와 1주일 분량의 과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한 주 내내 과제에만 매달려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므로 남는 시간에는 주로 혼자서 원서 읽기와 장문번역 연습을 했다. 사실 맨 처음에는 독학용 텍스트로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나 《다빈치 코드》처럼 한글로 재미있게 읽었던 일반 성인용 작품의 원서를 택했었다. 하지만 내가 번역은 고사하고 원서 자체를 제대로 읽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기 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문장을 즐길 수가 없었다. 여전히 부족한 어휘력 탓에 한 페이지에도 몇 개씩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것은 그렇다 치고, 분명 한글로 읽었을 때는 탄탄한 구조와 치밀한 복선을 갖추고 있던 각 문장의 유기적 연결이 영어 원서에서는 이상할 정도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영문과에 다닌 가락이 있는데 영어 텍스트 읽기는 남들보다 좀 유리하겠지.’라는 헛된 자만심이 순식간에 못난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생각해보니 대학에 다니던 시절 접한 원서들은 일종의 수업 교재였기 때문에 ‘즐기며 읽었다’기보다는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부분을 꾸역꾸역 공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물론 이것은 전공 학점이 3.0도 채 안 되는 열등생의 변명이고, 우수하고 성실한 학생들은 뭔가 달랐을 수도 있다).


복선도 구조도 즐길 수 없으면서 그저 한 단어씩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구글 번역기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아니, 스릴 있는 부분은 손에 땀이 나도록 긴장감 넘치게, 재미있는 부분은 배꼽이 빠지도록 웃기게 옮길 수 없다면 고객들이 영어사전을 백 개쯤 달달 외우고 있는 기계나 미국에서 이십 년쯤 살다 온 원어민을 두고 굳이 내게 돈을 주며 일을 맡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나는 급히 서점의 외서 코너로 달려가 내가 독서의 재미를 느끼며 술술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원서를 찾아보았다. 내 눈은 《다빈치 코드》에서 《해리 포터》로, 다시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급격히 낮아졌다. 결국 ‘초등학교 저학년용’이라는 팻말이 붙은 서가에서 《찰리와 초콜릿 공장》을 비롯한 동화책 시리즈를 사서 나오는 마음은 솔직히… 조금 많이 착잡했다.


하지만 수준에 안 맞는 성인용 도서에 집착하지 않고 어린이용 책부터 읽어나가기 시작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 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어른용 책을 읽고 번역한담….’이라는 애초의 걱정과는 달리, 일단 영어책의 구조에 익숙해지자 텍스트의 수준을 높여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지 않았다. 20년 이상 깔짝깔짝 영어 공부를 해온 세월이, 그리고 한글로나마 다양한 책을 읽어온 노력이 아주 의미 없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동화책 시리즈 10여 권을 몇 주 만에 다 읽고 ‘초등학교 고학년용’ 원서인 《해리 포터》로 넘어갔을 때는 확실히 서점에서 같은 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 들던 당혹감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입문반 수업 기간은 이렇게 강의도 듣고 과제도 하고 나름대로 독학도 하면서 전반적으로 즐겁고 희망차게 지나갔다. 내게 원서 읽기 능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점도 아주 심각한 정신적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내가 처음부터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것도 아니고, 아직 공부할 길이 구만리인데다, 적어도 입문반에서는 내 성적이 그다지 낮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토록 아마추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 시절 초반에 가장 많이 들었던 기분은 ‘행복감’이었다. 일주일 동안 꼼꼼히 준비한 과제를 들고 후드티에 운동화 차림으로 상수역으로 향하는 동안에는 한 주 동안의 노력에 대한 평가와 새로이 배울 지식에 대한 기대로 마음이 부풀었다. 그렇게 도착한 아카데미 건물은 같은 기관에서 운영하는 출판번역 에이전시 사무실을 겸하고 있어서, 강의실로 향하는 동안 소속 번역가들의 작업 스케줄을 관리하는 매니저 사무실과 에이전시의 신간 번역서가 쭉 진열된 책장을 지나게 되었다. 나는 (아마도) 그 복도를 지나는 다른 모든 수강생들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그 책장에 내 이름이 ‘옮긴이’로 올라간 번역서가 꽂히리라는 상상을 하며 방정맞게 들썩이는 입 꼬리를 짐짓 태연한 표정으로 꾹 누르곤 했다.


하지만 입문반 수강 기간이 끝나고 중급반으로, 다시 실전반으로 진급하는 동안 행복과 불안의 비율은 점점 역전되기 시작했다. 과제의 양이 늘어났다든지 텍스트의 난이도가 올라갔다든지 하는 당연한 얘기는 굳이 자세히 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벼운 지적 호기심으로 수강신청을 한 학생들의 비율은 점점 줄어들었고, 수업 분위기 또한 프로 출판번역가를 꿈꾸는 수강생들에 맞추어 진지하고 엄격해졌다는 것이다.


단순히 ‘번역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과 ‘프로 번역가가 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내 관심사 또한 전자에서 후자로 자연스레 옮겨갔다. 영어 학원을 다니고 입문반에서 기초지식을 쌓을 때까지만 해도 내 주된 고민은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을 만나면 어떡하지?’, ‘마감에 늦으면 어떡하지?’같은 기술적이고 절차적인 고민들이었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이 진행될수록 이러한 생각 자체가 지극히 나약했다는 사실이 점점 분명해졌다. 업계를 막론하고 한 분야의 프로라면, 그것도 경력과 평판이 전부인 프리랜서라면, 기술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은 당연히 있어서는 안 되고 납기에 맞추지 못하는 것은 애초에 자격 미달이었던 것이다.


한때 최종 목표라고 생각했던 자질이 프리랜서에 입문하기 위한 기본 조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새로운 종류의 초조함이 엄습해왔다. 알고보니 세상에는 꽤 괜찮은 실력을 가진 번역가들이 수두룩했다. (마찬가지로 꽤 괜찮은 그림 실력, 글 실력, 요리실력, 영상 편집실력을 가진 프리랜서들은 정말 수두룩 빽빽하게 존재한다) 특별히 천재적인 기술을 갖추고 있지 않은 이상, 수많은 경쟁자들 사이에서 내 존재를 어필하고 일감을 따내려면 업계와 관련된 기술 이외에도 뭔가 내세울 수 있을 만한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


아카데미 생활이 중반을 넘어설 무렵 찾아온, 고만고만한 실력만 갖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은 맨 처음 퇴사를 결심했을 당시 내 마음을 괴롭혔던 질문을 또 다시 수면 위로 끄집어냈다.


평범한 전공에, 평범한 경력에, 취미와 특기마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눈에 띄는 플러스 알파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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