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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메리 Sep 13. 2018

이렇게 평범한 내가 프리랜서를?

기술도 없는 사무직 퇴사자의 프리랜서 도전기


한 달 동안의 백수기를 꿀처럼 달게 보낸 나지만, 사실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휴식 기간은 한 달이 아니라 석 달이었다. 5년간의 회사 생활을 마친 만큼, 적어도 번역 아카데미가 개강하기 전까지는 조금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안일한 결심은 퇴사 직전 등록한 아카데미의 중급반 편입 시험에 떨어지면서 한 순간에 와르르 무너졌다.


번역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수많은 기관 중에서 내가 선택한 배움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출판번역 에이전시 중 한 곳이 운영하는 부속 아카데미였다. 아카데미의 커리큘럼은 각각 3개월 과정의 입문반, 중급반, 실전반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강좌 설명을 보니 입문반에서는 번역에 필요한 영문법과 국문법 강의가, 중급반 이상에서는 본격적인 번역 기술 강의가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돈과 시간 면에서 한정된 자원밖에 갖고 있지 못했던 나는 ‘기초 번역 테스트에 통과하면 입문반을 건너뛰고 바로 중급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안내 문구를 읽은 순간부터 곧바로 중급반에 편입해서 입문반 3개월에 해당하는 시간과 수강료를 아낄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 실력이 바로 프로가 될 만큼 특출나지 않다는 사실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영문과 출신인데다, 평소에 책도 좀 읽고 글쓰기도 남들보다 못하지 않는다고 자신했기 때문에, 내가 입문반 수업부터 들어야 할 거라고는 솔직히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수강 신청서와 함께 테스트 번역문을 제출하고 마음 편히 결과를 기다렸다. 자신감이 너무 넘친 나머지 신청 메일의 말미에 ‘좋은 결과 기다리겠습니다^^’ 따위의,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멘트를 덧붙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며칠 후 내게 날아온 답장에는 ‘현재 수준으로는 입문반부터 시작하셔야 할 것 같다’는 단호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답장을 읽는 순간 등이 뻣뻣해졌다. 아카데미 신청 요강에는 ‘실전반 수료자 중 성적 우수자에 한해 출판번역 일감이 주어진다’고 명시되어 있었고, 내가 이래저래 알아본 바에 따르면 안정권은 고작해야 상위 10~20% 정도였다. 게다가 수강 후기를 보니 영어 비전공자 중에도 입문반을 건너뛰고 중급반 수업부터 시작한 사람들이 왕왕 있었다. 영문과 출신이니까(사실은 학점도 그다지 높지 않으면서), 글쓰기를 좀 하니까(레포트 외에 제대로 된 글은 써본 적도 없으면서) 남들보다 살짝은 유리하겠지 하는 섣부른 생각은 순전히 내 오만이었던 것이다. 드높았던 자신감은 탈락의 충격과 함께 순식간에 바닥까지 추락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만큼 뒤쳐진다면,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기는 고사하고 진입조차 할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방정맞은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사직서까지 제출한 마당에 이대로 시작도 않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당장 아카데미 개강 전까지 다닐 영어 학원을 물색했다. 기왕이면 짧은 기간 안에 최대한 스파르타식 수업을 하는 곳으로. 다행히 운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마침 내 퇴사 시기가 각 대학의 방학 시즌과 거의 맞물리면서, 대형 학원마다 종일 수업으로 두 달 만에 영어 실력을 확 올려준다는 방학특강을 앞 다투어 개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점에는 적금 만기를 딱 이 즈음으로 설정해 둔 3년 전의 내게 기특한 마음마저 들었다. 어쨌든, 넘치는 학원 강좌 중에서 인터넷 검색과 지인들의 평을 꼼꼼히 따진 끝에 최종 선택된 커리큘럼은 집에서 그렇게 멀지 않고 후기가 괜찮았던 모 어학센터의 여름방학 집중코스였다. 레벨테스트를 거친 뒤 내가 배정된 반은 가장 수준이 높은 반(Advanced) 보다 한 단계 아래에 있는 반(Intermediate High). 이때는 중급반 편입 실패의 여파로 자신감을 많이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위에서 두 번째 반이라도 감지덕지하는 마음으로 수강신청을 했다.


한 달의 꿈같은 휴식기가 끝난 뒤 다시 매일 오전 9시까지 학원으로 출근(?)하는 생활이 시작되었다. 수업 시작 시간이 전 회사의 출근 시간과 똑같았을 뿐더러 두 건물의 위치마저 비슷했기 때문에, 나는 졸지에 두 달 동안 예전 출근 지하철을 똑같이 타는 신세가 되었다. 만원 지하철에 몸을 싣고 덜컹대는 동안에는 내가 진짜 퇴사를 한 것인지, 한 달 간의 특별 휴가를 얻었다가 회사로 복귀하는 것인지 살짝 헷갈리기도 했다. 정장 스커트 대신 청바지를 입고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는 점만이 내가 직장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주었다. 몇 번은 멍하니 걷다가 나도 모르게 회사 쪽 출구로 향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행선지는 회사가 아니라 학원이었다. 회사는 돈을 주는 곳이고 학원은 돈을 내는 곳인데 어째서 후자로 향하는 발걸음이 훨씬 설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방학특강 수업은 예상대로 대학생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막연히 취업 대비 영어공부를 하러 온 학생들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요리나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의 유학을 진지하게 준비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 어린 나이에 벌써 하고 싶은 일을 찾고 체계적으로 준비해 가는 모습이 멋지기도 하고 새삼 부럽기도 했다. 다른 수강생들에 비해 나이도 많은데다 자기소개 시간에 직장을 그만둔 상태라고 털어놓았던 나는 회화 수업 때마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실 거예요?” 라는 호기심어린 질문 세례를 받았다. 스무 살이 갓 넘은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들보다 열 살쯤 많은 나이에 퇴사라는 길을 택한 내가 앞으로 어떤 비전을 갖고 있는지 충분히 궁금할 만도 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대개 “우선 쉬면서 좋아하는 영어 공부를 하는 중이다. 지금은 미래에 대한 계획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데 집중하고 싶다.”라는 식으로 어물쩍 진짜 대답을 회피했다. 번역 테스트에서도 탈락하고 어학센터 레벨테스트에서조차 가장 높은 반을 배정받지 못한 내가 차마 프로 번역가를 지망한다고 당당히 말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처음 다녀보는 영어학원은 내 실력의 한계를 부끄러울 정도로 낱낱이 보여주었다. 내가 지금까지 한 영어공부는 순전히 수능이나 토익 준비에 국한된 어휘나 문법 암기에 불과했고, 일주일에 5일을 하루에 몇 시간씩 영어로 듣고 말하고 읽고 쓰는 동안 내 비루한 자산은 금방 밑천을 드러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내 실력 부족이겠지만, 사실 이 시기에는 한국식 영어교육이 실질적인 영어실력 향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그리고 점수따기용 영어 공부에 투자해 온 10년 이상의 세월이 조금 억울하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아래에 있는 짧은 문장을 사전 없이 한 번에 해석할 수 있겠는가?


-A sea anemone will retract its tentacles when disturbed.


참고로 당시의 나는 하지 못했다. 정답은 ‘말미잘은 공격받으면 촉수를 오므린다’이다. 이 문장에서 내가 모르는 단어는 ‘sea anemone(말미잘)’와 ‘tentacles(촉수)’였다. 내가 수능 필수 어휘인 ‘disturb(방해하다, 괴롭히다)’와 토익 필수 어휘인 ‘retract(철수하다, 움츠리다)’는 잘 알면서 말미잘이나 촉수 같은, 영어 원어민이라면 초등학생도 알고 있을 기본 단어를 모른다는 사실은 솔직히 약간 쇼크였다.


이렇게 자신감도 실력도 부족한 나였지만, 그 두 달의 시간동안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는 사실만큼은 자부할 수 있다. 평일 내내 진행되는 수업에서는 언제나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강의를 한 글자라도 더 흡수하기 위해 입과 귀를 바쁘게 움직였고, 오후 2시경 학원을 마치면 곧바로 집에 돌아와 그날 배운 교재와 필기노트를 정리하며 다시 한 번 복습을 했다. 복습이 끝나면 학원 수업과 별개로 약 400페이지짜리 토플 단어장을 앞에서부터 통째로 암기했다. ‘통째로’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단어장 속에 있는 핵심 어휘뿐만 아니라 예문 하나하나를 달달 외우는 식으로 공부했기 때문이다. 가령 'resist(내성이 있다)'라는 단어를 외울 때는 ‘Hematopoietic stem cells are one of the few cell types able to resist infection with HIV(조혈모세포는 HIV 감염에 내성이 있는 몇 안 되는 세포 중 하나이다)' 라는 예문까지 토씨 하나 빼지 않고 일단 암기했다. 죽기 전에 ‘조혈모세포’라는 표현을 한글로든 영어로든 써먹을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중요도를 재고 따지며 공부하다가 ‘말미잘’ 같은 단어를 놓치는 실수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이미 직장마저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내 실력이 생각보다 형편없이 모자라다는 초조함을 잊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단어 외우기에 집착했는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찾아오는 ‘고등학생 때 이렇게 노력을 했으면…’, ‘대학생 때 이렇게 고시 공부를 했으면…’ 하는 식상한 잡념을 몰아내며 두 달을 꼬박 투자한 결과, 내 영어 실력은 아직 부족한 와중에도 스스로 느낄 수 있을 만큼 훌쩍 성장했다. 코스를 마무리할 즈음에는 턱걸이로나마 Advanced 반 진급 테스트에 통과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어깨를 짓누르던 육중한 불안에 티끌만큼의 희망을 더한 상태로 본격적인 번역 기술 공부를 시작했다. 부디 이 기술이 회사 밖에서 먹고 살 길을 열어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작가 인스타그램: @seo_merry

작가 유튜브: 서메리MerryS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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