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사랑 큰딸이 한 달간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그녀가 보내온 첫 번째 사진은 화려한 빵들. 배낭 여행하면 약간 굶주리고 허기진 여행 아닌가? 살이 좀 빠져서 돌아오길 기대했는데 첫 사진부터 빵인 걸 보니 그녀의 여행 콘셉트는 먹방 투어가 아닌가...
소망이는 어려서부터 사람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교회 가면 어떤 집사님들이 오셨는지 뒷짐 지고 출석 체크를 하러 다녔다. 온 교회의 사랑과 축복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집안에서도 첫 아이여서 양가의 축복과 관심이 넘쳤다. 총명하기도 해서 어른들의 기대도 컸고...
그런데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는데 아이의 읽기 능력이 답보상태였다. 나는 불안했고 여기저기 호소해 보았지만 모두들 내가 욕심이 많다고 했다. 그렇게 아이의 학습을 봐주다가 큰소리 나는 일이 잦아졌다. 더듬거리고, 엉뚱한 글자를 붙여 읽고, 읽고 나서도 내용을 이해 못 하고... 나는 '난독증'이라는 단어의 존재도 몰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을 해보았고 그런 증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남편의 주재원 발령으로 중국으로 출국을 하게 되었다.
우리글도 소화하기 힘든 아이가 국제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데도 아이는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해 갔고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했다. 약 4년 간의 중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복귀하자마자 딸은 중학교에 입학했다. 한국의 중학교! 생각만 해도 공포스러웠던 그 단어. 한 학년을 내려서 초등과정을 1년 하고 중학교로 갈 것인지 제 나이로 진학할 것인지 많은 고민이 있었지만 아이의 선택은 중학교 진학이었다. 그때까지도 나는 아이의 공부를 놓지 않고 있었다. 동시에 소아정신과에 데리고 다니며 난독증을 고쳐보려고 길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녔다.
그러기를 6개월 정도 하다가 이게 누구를 위한 일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아이도 나도 너무나 불행했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며 아이를 다그치는 일을 그만하고 싶어졌다. 엄마와 아이의 관계를 위해 공부는 그만 내려놓으라는 조언도 있었고. 인정하기로 했다. '꼴찌여도 괜찮다, 너는 정말 훌륭한 점이 많잖아'라는 이야기를 해줄 수 있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게 하기로 했다. 다행히 아이가 다닌 중학교는 경복궁 옆에 있는 유서 깊은 학교로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시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계신 학교였다. 아이의 사정을 잘 이해하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셨다. 행복한 꼴찌로 잘 졸업했다. (정확히는 꼴찌에서 네 번째? 우린 '네 다음에 세 명이나 더 있어?' 라며 유쾌하게 웃을 수 있었다!)
대안 학교를 거쳐 지금은 수도권에 있는 대학에서 아동청소년 상담을 공부하고 있다. 소망이가 대학생이라니... 고3 담임에게 소망이는 대학을 안 보내고 기술을 가르치겠다고 했더니 선생님이 '이런 아이일수록 대한민국에서는 꼭 대학을 가야 합니다'라는 좀 슬픈 현실을 말씀하셨다. 대학은 공부하러 가는 곳인데 가서 또 공부 때문에 좌절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수시 합격했고 지금은 대학 3학년, 휴학 중이다.
장황하게 아이의 성장사를 읊었다. 솔직히 나는 큰딸이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까 걱정을 내려놓지 못했다. '사람 노릇'이라는 표현이 좀 불편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의미하는 '사람 노릇'은 그 나이대에 맞는 사회적 요구에 대한 부응을 말하는 것이다. 그 나이에 가야 할 학교에 다니고,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소외되지 않고, 적절한 나이에 직장을 잡고, 결혼하고... 하는 등의 사회적 스케줄을 잘 따라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말이다. 그런데 이 아이가 그걸 해내고 있다.
일단 그게 어떤 대학이든 재수도 하지 않고 수시로 합격을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를 찾아서 열심히 사진을 찍는데 꽤 멋진 작품이 나온다. 운전면허 필기에서 떨어져 낙담하면 어쩌나 해서 권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떡 하니 운전면허 시험도 합격했다(사실 필기시험날 함께 갔다. 남들 시험 다치고 나오는데 시험 종이 울리고서야 환한 얼굴로 나오는 거다. 마지막 문제 찍었는데 그 문제 덕에 합격했다고! ㅎㅎㅎ). 심지어 번듯한 남자 친구도 있다! 휴학하고 자신이 번 돈으로 유럽 여행 중이다. 친구도 많다. 나는 왜, 뭘 걱정한 거지?
아이의 인생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내 손을 떠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이는 본인의 핸디캡을 열심히 극복해 나아가고 있다. 그 아이가 난독증이라는 학습장애를 갖게 된 것이 내 탓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괴로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그런 장애물과 아픔이 있었기 때문에 남을 더 잘 이해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현재 겪고 있는 고통이 나를 죽이지 못한다면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고 니체 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던가. 소망이는 점점 강해져 가고 있는 중이다. 내가 할 일은 응원과 기도뿐이다.
큰아이는 방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코로나 덕에. 온라인 수업에서 발표가 있을 때마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며 하얗게 질린 얼굴로 경직된 손을 주물러 달라고 했었다. 실수와 비웃음에 극도로 민감해져 있었다. 이해가 가면서도 어떤 원인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밤새 대화를 했는데 상하이 국제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중국어 시간에 아이들이 자기와 짝이 되면 한숨을 쉬며 대놓고 투덜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업 시간에 하는 수행 평가 같은 활동에서 우리 아이는 뭘 써야 할지도 몰라 백지를 낸 적이 있었는데 창피를 당했었나 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오열을 했다. 몇 년이 지난 이야기인데 엄마는 딸이 학교에서 그런 일을 당한 것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무너졌다. 왜 그걸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을까...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도 학교에 가지 않겠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그날 함께 안고 많이 울었다.
아이의 학습 능력 때문에 마음이 아픈 엄마들에게 힘이 되었으면 좋겠다. '명문 대학에 못 가면 어쩌나'가 아니라 '사람 노릇'이 걱정이었던 나는 '사람 노릇'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 노릇' 할 줄 알면 인생 성공한 거 아닌가? 아이가 좀 느리면 느리게, 자빠져 있으면 엄마도 함께 자빠져서 기다려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마음이 아픈 엄마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