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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엌에서 만나는 깨달음

만물과 친밀해지는 설거지의 지혜

by 정영기

부엌 창문에 저녁노을이 조금 남아 있었다. 선미 보살님은 싱크대 앞에 작은 발매트를 펴고, 허리를 한 번 쭉 편 다음 물을 틀었다. 따뜻한 물이 손등을 스치자 오늘 하루 내내 굳어 있던 어깨가 먼저 풀렸다. 보살님은 조용히 합장하듯 손을 모았다. 들숨에 “맑아짐”, 날숨에 “부드러움.” 소리 내진 않았지만, 그 두 낱말이 가슴 안쪽에 자리 잡는 게 느껴졌다.


첫 번째 접시를 집자, 유약이 발라진 가장자리의 매끈함이 손바닥에 또렷하게 닿았다. “여기 있네.” 속으로 한마디 하고 스펀지를 밀었다. 거품이 일었다 터지는 소리가 사알사알. 날숨이 길어졌다. 헹굼 물에 접시를 비스듬히 들이대자, 물줄기가 은색 실처럼 흘렀다. “맑아졌다.” 보살님은 접시 하나를 물받이에 세우고 다시 들숨을 맞았다. 한 접시, 한 호흡. 서두르지 않으면서도 일은 착착 진행됐다.


두 번째 접시는 남편의 밥그릇이었다. 낮에 괜히 서운했던 말이 문득 떠올랐다. “또 그 생각이네.” 보살님은 손바닥에 와닿는 미지근함을 먼저 확인하고, 거품을 문지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그릇 쓰는 이, 오늘도 평안하길.” 비누 거품이 가장자리에 동그랗게 모였다가 물에 실려 내려갔다. 서운함도 거품처럼 일어났다 사라진다. 애써 밀어내지 않고, 떠오르면 보았다가, 호흡에 실어 흘려보내니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그때 휴대폰이 식탁에서 웅— 하고 떨었다. 단톡방 알림. 예전 같으면 바로 손을 닦고 확인했을 것이다. 보살님은 일부러 화면을 보지 않았다. 거품이 터지는 소리를 한 번 듣고, 다시 호흡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설거지와 함께 있자.” 마음이 딴 데로 갔음을 알아차리고 조용히 돌아오는 일, 도망가려는 강아지를 다정히 다시 데려오듯 했다. “괜찮아, 다시 오면 돼.” 그렇게 자기에게 말해 주니, 급한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세 번째 접시는 아들의 국그릇이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무겁게 느껴졌다. 손목을 조금 세워 힘을 분산하고,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발을 바꿔 섰다. “물이여, 마음을 맑히소서.” 물을 트는 순간마다 보살님은 짧게 그렇게 빌었다. 국그릇 가장자리를 돌며 스펀지를 미는 동안, **“엄마, 오늘 국 맛있었어.”**라는 말이 떠올랐다. 감사함을 다시 듣고 미소 짓는다.


네 번째 접시는 며느리의 접시였다. 지난 주말의 사소한 오해가 마음 끝에 아직 남아 있었다. 보살님은 접시 표면에 남은 양념을 동그랗게 그리며 닦다가 멈추었다. 가슴의 뻣뻣함·턱의 힘·눈썹 사이의 조급함을 있는 그대로 본다. “짜증 있음.” 이름을 붙이자, 갑자기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 그릇 쓰는 이, 건강하고 편안하길.” 무엇을 해야 할지 재빨리 결정하려 들지 않고, 축원의 말이 물살을 타고 흘러가도록 둔다.


보슬비 같은 물소리 사이로, 남편이 부엌에 들어왔다. “나는 닦고, 당신은 물기.” 역할을 나눈다. 두 사람이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일을 했다. 접시 하나를 세울 때마다, 남편 쪽에서 수건으로 살짝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마저도 리듬이 됐다. 보살님은 물줄기 아래 접시를 기울이는 순간에 잠깐 멈춰, 물의 온기와 무게를 손바닥으로 다시 확인했다. “맑아졌다.”라는 말이 습관처럼, 그러나 소홀하지 않게 되풀이된다.


한동안 그렇게 흐르다가, 문득 보살님은 이 그릇이 여기까지 오는 길을 떠올렸다. 흙을 빚던 손, 가마의 열기, 상자를 옮긴 기사, 매대의 점원, 오늘의 밥상. 멀리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가까워졌다. “함께 지은 밥.” 보살님은 속으로 한 줄 감사 인사를 건넸다. 설거지가 집안일에서 공동의 공양이 되는 순간.


찻잔을 씻을 차례가 되자, 보살님은 동작을 조금 늦췄다. 찻잔의 얇은 입구를 손가락으로 살짝 문지르며, 오후에 다녀온 법당 풍경이 떠올랐다. 향냄새, 염불 소리, 합장한 손의 온기. “오늘 나도 누군가에게 따뜻했을까?” 스스로에게 묻자, “괜찮지?” 하고 건넸던 자신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질문이 저절로 답이 된다.


젖은 수세미를 짜는 동안, 허리가 살짝 뻐근해졌다. 보살님은 “멈춤 3초”를 떠올렸다. 어깨를 털고, 턱의 힘을 풀고, 발바닥을 느낀다. 들숨 “여기”, 날숨 “부드러움.” 다시 손을 움직이자 동작이 더 단정해졌다. 서두르지 않아도 끝이 보인다.


마지막 접시를 헹구고 물을 잠그자, 부엌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보살님은 물받이에 세워둔 그릇들을 바라보다가, 마른 수건을 하나 꺼내어 물자국을 가볍게 훑었다. “오늘도 함께 먹고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아주 작게, 그러나 또렷하게 인사했다. 남편이 수건을 접으며 중얼거렸다. “거품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만 봐도 마음이 맑아져.” 보살님은 웃었다.


부엌 불을 끄고 나오기 전, 보살님은 한 번 더 싱크대를 돌아보았다. 물방울 몇 개가 여전히 스테인리스 위에서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꼭 밤하늘의 작은 별 같았다. 마음속에서 조용한 숨이 한 번 더 들고 났다. 오늘 설거지는 ‘빨리 끝낼 일’이 아니라, 그릇·물·함께 사는 이들·나 자신과 가까워지는 시간이었다. 문을 닫고 나오며 보살님은 속으로만 말했다. “한 접시, 한 호흡.”



Enlightenment is intimacy with all things.


깨달음은 만물과의 친밀함이다. 여기서 여기서 **‘친밀함’**은 대상과 합쳐지는 신비 체험이라기보다, 나와 세계 사이의 불필요한 거리감이 사라진 투명한 접촉을 뜻해요. 판단·해석을 잠시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와 직접 닿아 있는 상태—몸 감각, 감정, 타인의 존재, 상황의 사실성과 가깝게 지내는 태도죠. 그래서 친밀함은 소유가 아니라 관계이고, 도피가 아니라 정직한 마주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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